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인생은 편도 차선을 달리는 열차다. 따라서 지나간 정류장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119에 동승하여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산모는 묻는 말에 대답도 하고 아직 의식은 또렸했으나 언제 위급한 상황에 도달할지 알 수 없었다. 우리 병원에서 세브란스까지는 대략 20분 정도 걸린다. 그러나 언제 쇼크에 빠질지 모르는 산모와 함께 가는 20 분은 너무도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영국의 라디오 방송에서 런던에서 어느 지방 도시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어떤 방법인가 묻는 설문이 있었다고 들었다. 가장 호평을 받은 대답은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가는 방법이라고 하는 대답이었다고 한다. 나는 세브란스 병원까지 가는 방법 중에서 가장 먼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옆에 함께 탄 남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계속 산모에게 말을 시키면서 의식을 확인했다. 아직 세브란스 도착까지는 시계 상으로는 몇 분이 더 남았다. 산소 포화도와 맥박을 측정하는 옥시미터에서 들리는 맥박 소리가 빨라졌다. 혈압이 떨어지면 반대로 맥박은 빨라진다. 자궁 파열로 인한 복강 내 출혈이 바이탈에 영향을 줄 정도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길게만 느껴지는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 응급실에 도착하여 산부인과 담당 의사에게 산모를 인계했다. 산모는 다행히 그때까지 의식은 잃지 않고 있었고 응급실에 도착하여 측정한 혈압은 내 기억으로는 아마도 90 / 60 정도 즈음으로 다소 낮았다. 응급실에서 시행한 초음파 검사에서 자궁 파열로 진단이 되었고 태아는 사망한 상태라고 담당 의사가 말해 주었다. 무덤덤한 느낌이었다. 태아의 사망 통고가 이처럼 무덤덤하게 들리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산모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더 절박한 상항 때문에 다른 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처럼 여겨졌다. 간단한 절차와 검사를 마치고 산모는 수술실로 이동했다. 나는 외부인이기 때문에 수술실에 들어갈 수는 없어서 수술실 앞 복도에서 함께 간 병원 직원과 언제쯤 수술이 끝날지 마음을 졸이면서 기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다리는 것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종류의 기다림이 다 괴롭지는 않다. 그녀를 만나기 100미터 전쯤으로 설레는 기다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놓인 선택의 여지없는 이 외길은 괴롭기만 했다. 더군다나 나는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었다. 아니 그냥 서 있기는 마음이 힘들어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처럼 서성거렸다. 그리고 복도의 저쪽 끝에는 역시 나처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불안한 마음일 남편이 같은 바퀴를 굴리는 중이었다.
자궁 파열의 수술은 수혈을 하면서 파열 부분을 봉합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고 봉합으로 지혈이 되지 않을 경우 동맥 색전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최후의 선택은 지혈을 위해 자궁을 적출하는 수술이다. 단순 봉합으로 끝났다면 이미 나왔어야 할 시간이 지났지만 산모는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혈액 팩을 들고 서둘러 들어가는 수술실 직원의 모습만 보였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나왔다. 나와 직원, 남편까지 모두의 눈이 일제히 쏠렸다. 흰 천을 덮은 침대가 수술실 안쪽에서 슬로비디오를 걸은 것처럼 느리게 나왔다. 실제로 그렇게 느리게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드라마를 보면 사랑하는 연인이 나에게 올 때 보통 그렇게 오던데 이건 아니지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 여기서 다행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흰 천에 덮인 것은 사망한 아기였다. 아기의 시신을 덮은 침대가 옆으로 지나가자 함께 간 병원 직원은 눈물을 억제하지 못했다. 나는 슬프달지 혹은 두렵 달지 혹은 황당 하달 지 복잡한 감정이었는데 관계자 외인 것처럼 그저 멍하니 있었다. 흰 천의 침대는 올 때 그런 것처럼 갈 때도 서서히 복도의 끝으로 사라졌다. 긴 시간 같았지만 아마도 두세 시간쯤 지났을 때 수술실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직원 한 명이 나오더니 우리와 남편에게 수술 경과를 간단히 설명했다. 지혈이 안되어 자궁 적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적출 후에도 혈관에서 출혈이 계속되어 수술 담당 교수님께서 애를 쓰고 계시다는 이야기였다. 개복하고 보니 출혈양이 많고 적출 과정에서도 출혈이 꽤 있어서 혈액을 많이 수혈했다고 한다.
시간은 점차 흐르고 있었고 수술이 시작된 지도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났다고 생각하는데 정확히 얼마가 지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함께 간 직원과 수술실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수술실 바로 앞에 있지 않으면 왠지 더 불안해서 떠나 있을 수가 없었다. 수술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흘끔 쳐다보고는 했다. 아기는 어차피 잃은 것이라 어쩔 수 없지만 자궁 적출이라는 큰 희생을 안게 된 산모라도 생명을 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여기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모의 나이가 많았으니 비록 첫째를 우리 병원에서 낳았더라도 대학병원으로 미리 전원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산부인과 수련 중에 미친개라는 별명을 가진 전공의 4년 차 수석의에게 병동 스테이션에서 폭행을 당했을 때도 생각이 났다. 별일이 아니었음에도 간호사와 환자들이 다 보는 곳에서 얼굴에 멍이 들고 코피가 날 정도로 맞았다. 폭행을 당한 다음 날 아침 사직서를 들고 산부인과 주임 교수님께 찾아가려 했을 때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 있을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재수를 하지 말고 의과대학도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런 괴로운 상황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후회도 들었다. 온갖 순간의 회한이 밀려왔지만 지나간 시간으로 돌아가 다시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은 복잡하고 마음은 두렵고 괴로울 때 수술실을 나온 전공의 선생님에게 현재 상황을 물었다. 수술은 조금 전에 끝났고 산모는 중환자실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아직도 출혈이 있어서 배액관을 복강 내에 삽입하였고 50병 정도의 수혈을 했기 때문에 아직 생명과 건강에 지장이 없이 회복될지 알 수 없어 오늘 하루를 경과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미 많은 수혈을 했으니 헌혈 카드를 최대한 많이 확보해 달라고 하는 말도 했다. 우리 병원 직원들 중 혈액형이 맞는 직원과 직원의 친구, 남자 친구까지 참여해서 대략 10 여장의 헌혈 카드를 확보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옆에서 함께 듣던 남편께는 “다행이다. 아마 별 일 없이 회복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 말은 불안한 마음에 잠시도 수술실 앞을 떠날 수 없었던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궁 적출까지 이어진 자궁 파열을 예방하지 못하고 위험한 지경에 빠지도록 만들었다고 항의와 비난을 듣게 되진 않을까? 산모는 후유증 없이 잘 회복이 될까? 마음속은 온통 걱정과 불안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