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잘못에는 책임을 져야 하고 잘못이 없다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의료 분쟁에 관한 한 이런 법칙은 통하지 않는다.”
산모가 사망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제일 흔한 원인이 과다 출혈이고 그다음에 양수 색전증에 의한 호흡 곤란이나 임신성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 혹은 경련이 있다. 이런 문제는 노산이나 과숙아 임신인 경우 그리고 가족력이 있을 때 다소 발생률이 높다. 임신부의 나이와 관련하여 40세 이상인 경우에 모성 사망비는 79.7명으로 25\~29세 사이의 모성 사망비 10명의 거의 8배에 달한다. 노산일 경우 신생아도 저체중아가 되거나 조산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영아 사망률도 높다. 임신부나 신생아의 사망에는 의학적 요인 이외에도 출산을 담당하는 의료진이 의사인지 조산사인지 그리고 이용 가능한 분만 병원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등도 영향을 준다.
이처럼 산모의 사망 사례이든 다른 것이든 의료 행위를 할 때는 의료 사고가 발생하여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항상 있다. 이때 합의로든 아니면 법의 판결로든 의사가 형사법의 적용으로 징역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신 민사상 판결로 몇 퍼센트의 과실로 인정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피해 보상을 위해 상당한 액수의 배상액을 지불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지불하는 배상액은 사고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산과 영역에서의 사고들은 아기나 임신부의 건강상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거나 심지어는 사망 사고도 있어서 배상액이 다른 진료 과목보다 상당히 높다. 그중에서 이번 사례처럼 임신부가 사망하는 사례는 배상액이 매우 높아 병원에 큰 부담이 된다. 의사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분쟁 발생 비율이나 배상 금액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그런 점 때문에 분만을 돕는 대부분 산부인과 들은 배상 보험에 가입한 경우가 많다.
배상금 납입은 배상 한도와 본인 부담금 액수에 따라 매 분기마다 납입하는 액수가 달라진다. 나의 경우 최고 3억 원 한도까지 배상받을 수 있고 자기 부담금은 1천만 원으로 했다. 납입 총액은 산부인과는 외래 진료만 하는 경우와 임신 12주 이상의 낙태 시술을 하는 경우, 분만을 하는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 모두를 할 경우 연간 납입 총액은 958만 8천 원이고 낙태를 하지 않을 경우 842만 9천 원이다. 다음 순위가 성형외과와 피부과로 납입 총액이 936만 1천 원이다. 3번째는 정형외과등 외과 계열로 총액이 751만 5천 원이다. 가장 납입 총액이 적은 과는 내과 계열로 연간 납입 총액은 68만 3천 원이다. 나는 낙태 시술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연간 납입 총액 842만 9천 원에 계약하였다.
이처럼 산부인과는 분쟁율도 높고 배상액수도 높아서 의사들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과목이 되었고 기피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배상 보험금은 분쟁이 나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대로 없어지는 돈이다. 나의 경우 오래전에 배상 보험의 도움으로 혜택을 본 적이 있지만 그 이후는 분쟁이 없어 그대로 없어지는 돈이라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 번의 분쟁으로 지불하는 배상액이 너무 커서 보험에 가입해 두지 않으면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없어 앞으로도 분만을 하는 동안은 계속 가입해 있을 생각이다.
문제는 모든 의료 분쟁에서 배상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의사의 과실이 일부든 전체든 인정될 때만 배상 보험에서 지불을 받을 수 있다. 의사의 과실이 없는 경우 배상 보험금을 받을 수 없는데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의사의 과실이 없으니 배상할 필요도 당연히 없다. 문제는 최종 판결로 의사의 과실 여부가 밝혀지기 전에 환자나 보호자가 항의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분쟁의 당사자인 의사는 병원의 이미지 추락이나 정신적인 고통 때문이든 가능하면 빨리 합의하여 갈등을 끝내고 싶어 한다. 재판을 통하여 과실이 입증되지 않으면 배상 책임은 없고 입증되면 배상 보험에서 약정 금액만큼 지불하므로 의사가 지는 부담이 적다. 그러나 그동안 각종 매체를 통하여 사고 소식이 알려지면 병원의 이미지 손상으로 인한 경영 손실이 적지 않다.
그래서 배상 보험에서 인정받기 위해 의사인 나는 오히려 내가 과실이 있었다는 쪽으로 항변을 해야 헸다. 그래야 배상 보험에서 법적 분쟁 전에 보호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액수로 합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입한 의료 배상 보험은 대한의사협회에서 관리하는 배상보험이다. 그래서 어떤 분쟁에 대하여 배상을 할지 한다면 얼마나 인정해 줄지는 의사협회의 배상 보험 부서에서 판단을 한다. 배상 보험에는 진료 차트와 사고 당시의 상황을 적은 진술서 등을 보낸다. 배상금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사고 상황을 적어 보내어 이번 양수 색전증으로 산모 사망 사건에서는 결국 배상액을 받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1억 원이 넘는 배상액을 지불하고 합의하였지만 이는 양수 색전증이라는 불가피한 원인에 의한 것이라 액수가 적은 편이었다. 만일 출산 후 과다 출혈이 있는 산모의 조치 미흡, 상급 병원 전원 지체 등으로 의사의 과실이 많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훨씬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는 쪽으로 판결이 나거나 합의가 이루어진다. 아마도 그런 경우였다면 나의 분만 의사 인생은 거기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시달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에서 합의할 수 있도록 배상액이 결정되어 다행이었다. 역대급의 무더위라던 여름도 거의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려는지 날씨가 많이 선선해졌다. 더불어 이번 지옥도 끝나가고 있었다. 언제 또 그런 지옥이 펼쳐질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아는 어느 산부인과 선생님은 배짱이 정말 크다. 그분은 출산 과정 중에 산모든 아기든 잘못되어 의료 분쟁에 휘말리는 사례가 아주 많았다. 월분만 건수가 100명을 넘어 제법 규모가 큰 병원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어느 모임에선가 아기가 잘못된 어느 분쟁 사례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선생님은 담당 의사가 분만 과정에서 딱히 잘못한 점이 없다고 생각하여 작은 위로금 정도로 합의를 하고자 하였으나 아기 아빠가 강하게 반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지내던 어느 날 아기 아빠가 술이라도 먹었는지 얼굴이 불콰해진 채로 면담을 요청했다. 여전히 합일점을 찾지 못한 채 옥신각신하던 도중 아기 아빠가 갑자기 품에서 무언가 길쭉하게 종이에 싼 것을 꺼냈다고 한다. 한눈에 보기에 칼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고 한다. 그것을 내밀어 그 선생님의 배 가까이 가져다 대면서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고 하면서 협박을 했다고 한다. 병원 측에서 제시한 배상액에는 도저히 성이 차지 않고 분을 이기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 선생님은 제시한 위로금 이상의 합의금을 줄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흥분한 사람은 언제 갑자기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흥분하여 칼을 든 사람 앞에서는 누구나 겁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젠가 어느 마을에서 형제지간에 칼부림이 나서 둘 다 크게 다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사건의 발단은 심심풀이 화투로 소위 고돌이라는 이름의 화투였는데 똥 껍데기를 쌍피로 할지 말지 하는 문제로 싸웠다고 한다. 1점당 10원 내기였으니 판돈이라고 해 봐야 몇백 원 정도 수준으로 그야말로 심심풀이 화투놀이였을 텐데 결국 감정에 휘말리다 보니 그런 일까지 생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아니 불과 10점짜리 판에서 무슨 칼부림인가 싶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큰돈과 막강한 권력을 다투는 곳에서만 사건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여하튼 그때 그 선생님은 오히려 옷을 걷어 맨살을 드러내면서 배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고 한다.
“그래 찔러, 찌르고 이것으로 퉁치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응이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대응을 하자 오히려 아기 아빠가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섰다고 한다. 그 선생님은 더욱 배를 앞으로 내밀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제시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 그냥 찌르고 이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자고 더욱 강하게 말했다고 한다.
요즘 진료실에서 폭행도 드물지 않은 데 감정이 격해진 아기 아빠를 그런 식으로 자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나는 그 선생님의 대응이 굉장히 무모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나 같으면 그렇게 칼 들고 나타나기 전에 원하는 액수로 배상을 해 주고 말았을 것이다. 하물며 칼 든 사람 앞에서 배를 내밀다니…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흉내도 낼 수도 없는 배포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 동기 선생님의 생각대로 아주 큰 배상액은 아니고 위로금 정도로 마무리되었다고 들었다. 그 선생님의 말로는 결국 모든 것은 돈으로 해결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물론 나는 환자 혹은 보호자와 의사 간에 충분한 유대관계가 있고 최선을 다한다면 , 그리고 잘못한 일에 대하여는 진솔하게 사과한다면 꼭 돈이 아니라도 의료 사고가 원만히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물론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내 순진한 착각일 가능성이 많지만...
합의에 이르기 위한 골든 타임은 사실 없다. 위에서 예로든 선생님처럼 의사들의 생각과 대응도 다 다르고 기족이든 보호자든 상대방의 생각과 요구도 다 다르게 마련이다. 발생한 의료 사고의 과정과 결과도 똑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도 가능하면 환자 측과 의사 측이 서로 감정의 골이 너무 깊게 벌어지기 전에 문제를 마무리할 수 있다면 제일 좋다. 감정의 수습이 말로 하는 위로나 사과를 통해서 이루어지든 경제적인 배상을 통해 이루어지든 서로 수긍할 만한 수준에서 타협점에 이르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문제 이 타협점이 좀체 이루어지기 어렵게 환자 측의 요구 수준과 의사 측의 제시 수준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이다. 쉽게 합의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이 될 경우 합의를 빨리 끌어내기 위해 환자 측에서 언론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병원 입장에서는 이미 언론에 노출되어 이미지 손상을 입으면 굳이 미리 합의할 필요가 없어지고 결국 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손상받은 이미지는 합의에 이르더라도 회복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환자와 의사 간의 이런 간극 차이를 줄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의사의 과실이 없는 혹은 입증하기 어려운 경우의 불가항력적 사고는 정부가 환자들의 요구에 가까운 수준으로 배상액을 지불하고 의사의 형사 책임을 면제해 달라는 것이 의사들의 입장이다. 반면 시민 단체등은 형사 책임을 면피해 주는 것이나 배상액을 정부가 지불하는 것은 형평의 원칙에 맞지 않다고 반대한다. 물론 아직도 이 문제는 해결이 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출산을 돕는 산과 의사는 점점 이 현장을 떠나고 새로 산과 의사를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는 산과를 택하지 않은 의사나 의료계의 주장을 거부하는 정책자나 시민 단체의 사람이 지는 것이 아니다. 산과 의사가 꼭 필요한 산모들이 그 피해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