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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잊을 수 없는 산모

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by 팔랑심

"삶은 99%의 운과 1%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1%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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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수석의로 있을 때였다. 수석의는 전공의 4년 과정 중 마지막 연차인 4년 차를 말한다. 전문의 자격을 따기 직전으로 여러 술기나 지식 측면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른 의사다. 아래 연차들을 이끌면서 팀을 책임지는 의사이기도 하다.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을 따기 위한 전공의 과정에 들어간 1년 차는 보통 주치의라고 부른다. 입원 환자의 관리와 수술 보조 업무, 여러 가지 서류 작업 등 많은 업무를 맡는다. 그 위로 주치의를 돕고 수술에도 간혹 보조로 참여하는 2년 차가 있다. 바이스라고도 부르는데 비교적 시간의 여유가 있는 연차다. 2 년 차 위로는 의과 대학 학생들의 실습을 담당하는 역할이나 파견 근무를 하는 3년 차가 있다. 수석의 위로는 전임의 선생님이나 교수님이 있지만 그분들은 수술 등 의료 처치의 가장 중요한 부분만 수행한다. 수술의 전 처치나 본격적 수술 과정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피부 절개나 복강 절개, 수술의 마무리 부분에 해당하는 피부 봉합과 소독등의 마무리는 전공의들이 수행한다.


내가 수석의를 맡았던 해는 1990년도다. 4년 차 임무를 수행하는 1년 동안 2, 3달 간격으로 번갈아 가면서 산과 병동과 부인과 병동을 맡는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파견 근무를 나가기도 한다.
4년 차로 올라가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산과 병동을 담당하던 어느 날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산모를 만났다. 산부인과 전공의와 산부인과 전문의 기간을 다 합치면 대략 40년 가까이 된다. 기간이 길다 보니 그 기간 동안 잊을 수 없는 산모는 적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잊히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산모는 많지 않다. 그 몇 명의 산모 중 첫 번째 산모를 그때 만났다. 끔찍한 기억이라고 까지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즐겁거나 행복한 기억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나는 살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사실 거의 없다. 괴롭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혹은 안타까웠던 순간들이 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 기억들은 트라우마가 되어서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이런 점은 아마 다른 산부인과 의사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도 넘은 시절의 일이라 그때 산모의 나이나 세세한 주변 상황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지금도 그럴 것 같은데 그 당시 서울대병원 산과 병동은 32 병동과 35 병동 둘이었고 한 병동에는 대략 20명에서 30명 정도의 산모가 입원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32 병동은 일반 산모들이 입원하고 35 병동은 특진이나 VIP 산모들이 주로 입원했다. 하루 종일 수술 보조 업무를 하고 저녁 회진을 위하여 병동으로 올라갔다. 산부인과도 외과 계통이지만 대학병원 외과 계열의 전공의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술장에서 살고 저녁이 되면 회진과 차트 정리를 위해 병동으로 올라온다. 점심은 수술장 안에서 김밥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 일을 마무리하고는 저녁은 병원 근처의 고깃집으로 가서 팀원들과 함께 푸짐하게 먹는 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비만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산부인과 또는 외과 의사들 중에 배가 나온 곰돌이 아저씨 스타일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수술을 마치고 올라왔을 때 32 병동 수간호사님께서 낮에 외래를 통해 산모 한 명이 우리 팀으로 입원했다고 알려 주었다. 병동에는 한 명의 수간호사와 여러 명의 일반 간호사들이 3교대로 근무를 한다. 병원마다 다르겠지만 그때 내가 근무했던 대학병원은 교수님을 지정해 특진으로 입원하는 산모를 프라이빗 산모라고 불렀고 특진 교수가 정해지지 않고 일반 외래를 통해 입원하여 전공의들이 분만과 수술을 맡게 되는 산모를 넌 프라이빗 산모라고 불렀다. 넌 프라이빗 산모는 특별한 점이 없는 자연분만의 경우 주치의와 인턴, 어시스트 간호사가 한 팀이다.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수석의가 집도의가 되고 바이스, 주치의, 인턴, 스크럽 간호사, 서큘레이팅 간호사와 마취과 전공의 선생님이 한 팀이 되어 수술을 담당한다.


그날 외래를 통해 올라온 산모는 심한 척추만곡증이 있는 초산모였다. 속된 말로 꼽추라고 부르는 장애를 가진 산모였다. 허리가 심하게 굽어서 흡사 90도로 인사를 하는 자세처럼 보였다. 산부인과 전공의로 4년 가까이 수련하면서 다양한 산모를 만났지만 척추만곡증 산모는 처음이었다. 허리가 굽어진 탓에 키도 매우 작았다. 추측하건대 140cm 언저리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키였다. 그런 체구에 배만 볼록하게 나와서 보기에는 걷는 것조차도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척추만곡증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로 생기는 분도 있고 태어난 후에 사고나 질병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는데 거의 대부분은 선천적으로 얻는 장애다. 그 산모가 어쩌다 척추만곡증이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는데 특별히 사고를 당했다는 말은 들은 것 같지 않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선천적 장애로 평생 이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분들은 골반이 매우 좁고 심폐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임신을 해도 태아가 조산되거나 저체중아가 되는 경우가 많다. 척추만곡증의 정도에 따라 만삭 출산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우리 팀에 인계된 산모는 만곡증이 아주 심했으며 출산 예정일이 3, 4주 정도 남아 있었다. 이런 산모는 골반이 뒤틀려 있어 자연분만은 거의 불가능하며 제왕절개가 유일한 출산 수단이다. 출산은 고사하고 만삭까지 임신을 유지해서 건강하게 아기를 출산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다. 임신이 산모에게 위험한 순간인 것은 다른 산모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고위험 요인을 가진 산모는 그 위험이 몇 배나 높다. 그런 점 때문에 임신 전에 관리를 맡았던 내과 선생님으로부터 임신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권고를 이미 받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산모는 피임을 하지 않았다. 임신할 마음에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다.


그 산모의 입원 소식을 듣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우리 팀은 불난 호떡집이 되었다. 당시 서울대 산부인과 병동 산과에는 3팀이 있어서 외래에서 올라오는 산모를 돌아가면서 맡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때는 위험 부담이 별로 없는 평범한 산모가 배정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여러 고위험 요인 중 한 두 가지를 가진 고위험군 산모가 배정되기도 했다. 전치태반 산모나 쌍태임신 산모, 임신성 고혈압 산모는 고위험군 산모라고 부른다. 고워험군 산모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원치 않는 악결과가 발생할 위험이 높다. 어쩌다 운이 나쁘면 태아 사망이나 산모의 사망 또는 산모와 태아 모두의 사망과 같은 생각하기도 싫은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 이런 산모들은 당연히 다른 산모들에 비하여 몇 배 이상 주의를 기울여서 관찰해야 한다. 팀원 전체가 밤을 꼴딱 새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의사의 잘잘못이나 최선을 다 했는지 등 의료 과실의 유무를 떠나 악결과가 초래되면 거의 대부분 사례에서 의료 분쟁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은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이런 점이 의사로 하여금 산부인과와 같은 필수 진료과목을 기피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다행히 의료 분쟁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부작용이나 합병증의 발생은 의사에게도 괴로운 일이다.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스스로 수 없이 자책하고 고민한다. 그때 유도분만을 하지 말고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그때 자연 진통을 기다리지 말고 빨리 출산을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그때 흡입분만을 시도하지 말고 제왕절개를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하는 회의감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위험 부담이 있기 때문에 팀원 모두가 고위험군 산모가 자신의 팀으로 배정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물론 고위험군 산모도 누군가는 담당해야 만한다.
내가 산과 병동에 근무하는 동안 유독 고위험군 산모가 우리 팀에 많이 배정되었다. 내가 당직 근무할 때면 응급 산모도 다른 동료에 비하여 많아서 간호사들은 내가 당직하는 날이면 다들 긴장하고는 했다. 고위험군 산모든 아니든 야간에 출산을 위해 산모가 입원하면 전공의나 간호사나 피곤한 밤을 보내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의료계에는 의사가 평생 보는 환자 수는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다. 개업하고 나서 내가 수련하던 시절만큼 많은 산모의 출산을 맡지 못하는 것은 수련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많은 산모와 환자를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전공의 수련 기간에는 보수가 같지만 많은 산모를 보았고 출산을 돕는 산모의 숫자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는 개업의사인 지금은 적은 산모를 보면서 경영난에 시달린다. 이래저래 나는 운이 없는 의사인가 보다.
살면서 운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 적은 의과 대학에 합격했을 때뿐이었다. 그 이전과 그 이후 살면서 내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노력을 기울인 것에 비하여 그 대가는 항상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흔한 로또도 기껏해야 6등에 당첨된 것이 전부다. 로또는 내가 직접 산 적은 거의 없고 출산하고 퇴원하신 산모분들 중에서 간혹 선물로 주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만일 운이 좋았다면 인생의 행로가 많이 달랐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척추만곡증 산모가 우리 팀으로 배정된 것을 보면서 내가 운이 나빠 우리 팀이 고생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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