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의료에 관한한 부족함은 지나침보다 못하다."
지금까지 살면서 남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고 여자로 태어났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남녀 차별의 문화 때문이었든 장남이기 때문이었든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내가 알지 못하고 누렸던 특혜 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여자보다는 남자가 내 성격에 맞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산부인과 의사로 개업하기 전까지였다.
"어머 남자 의사네?"
외래 진료를 하다 보면 남자 의사라는 점 때문에 진료를 받지 않고 그냥 가시는 분들이 간혹 있다. 병원 이름에 내 이름을 걸고 개업했던 때에는 이름만으로도 남자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인지 그런 환자를 별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후 봄 산부인과 또는 진오비 산부인과라는 이름으로 병원을 개원하고 나서는 그런 경우를 드물지 않게 겪는다.
솔직히 별로 유쾌하지는 않다. 남녀 차별이 과거보다 덜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그때마다 여성들이 느꼈을 분노 혹은 절망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분노와 절망감뿐 아니라 때로 굴욕감이나 수치심도 드물지 않게 느꼈을 것이다.
남자 의사라는 것을 알고 그대로 진료를 받는 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진료를 포기하고 다른 병원으로 간다. 그래서 병원 외부 간판에 여의사 진료라고 쓴 산부인과들이 많다. 산부인과는 남자 의사에 비하여 여자 의사의 보수가 높은 유일한 진료 과목이기도 하다. 남녀 차별이 남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영역은 아마 산부인과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듯 다른 진료 과목에서라면 들을 일이 없을만한 용어 중 하나가 굴욕 3종 세트라는 말이다. 굴욕 3종 세트란 산부인과에서 행해지는 내진, 제모, 관장 3가지를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내진은 일반 부인과 진찰 때도 하지만 나머지 2가지는 임신부들의 진찰 때 이루어지는 의료 행위다. 그래서 굴욕 3 종 세트라는 말은 임신 출산을 다루는 산과에서 주로 쓰인다. 여기에 회음부 절개까지 더 해서 굴욕 4종 세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굴욕 3종이든 굴욕 4종이든 모두 출산과 관련하여 불가피한 의료 행위다. 그런데 왜 굴욕이라는 말을 앞에 붙였을까?
이런 굴욕은 여자 의사인 경우보다는 남자 의사의 경우에 더 많이 듣는다. 사실 내진 진찰은 자궁암 검사나 질염의 진단 치료와 같은 부인과 진료 때도 하는 진찰이지만 그런 경우 딱히 굴욕적인 진찰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유독 산과 진찰 때 이런 말이 쓰인다. 이는 진료 현장의 현실과도 관련이 있다. 부인과 진료나 출산 전 진료는 대부분 여의사들이 맡고 출산을 돕는 일은 거의 남자 의사들이 맡는다. 그렇다 보니 남자 의사들이 하는 내진이 불편하게 느껴질 것도 같다. 그러므로 남자 의사로서 분만을 돕는 일은 그 시작부터 굴욕적인 서비스를 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다시피 시작부터 그렇게 치부되는 것이 역시 유쾌하지는 않다.
사실 의학적 필요성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여성의 내밀한 신체에 대한 검사나 처치, 시술은 불편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생략할 수 있으면 생략하거나 하더라도 최소한도로 시행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나의 경우 관장은 거의 하는 경우가 없고 제모도 대부분 하지 않는다. 내진은 거의 모든 산모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회음부 절개는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다. 다만 임신 전 기간에 걸쳐서 아무리 필요성이 높다고 해도 내진이던 회음부 절개던 혹은 나머지 들에 대해서든 일절 하지 않겠다고 하면 출산을 돕는 의사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굴욕 3 종 세트는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전혀 굴욕스러운 것들이 아니다. 원래부터 굴욕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문화나 상식에 의해 결정된다. 손가락을 여성의 질 안으로 넣어서 자궁 경부를 만져 보는 내진은 다른 경우라면 성폭행과 다를 바 없다. 복부를 절개하는 외과 의사의 칼도 그것이 치료와 진단 목적이기 때문에 용인된다. 외과 의사가 아닌 또는 셰프가 아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상해할 목적으로 휘두르는 칼이 의사의 칼과 다르지 않다. 태아를 안전하게 순산하도록 돕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의료 행위 중에 굴욕적인 것은 없다. 어찌 보면 숭고한 행위다. 산모가 아기를 출산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순간이 아니라 기쁘고 숭고한 순간이다. 의료와 관련한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행해진 목적이 무엇인지를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내진은 필수 진찰"
굴욕 3 종 세트 중 가장 대표적이면서 임신 출산 과정에서 반드시 한번 이상은 받아야 하는 진찰이 내진이디. 내진을 통하여 얻게 되는 정보는 자궁 경부의 숙화 여부나 개대(자궁 입구가 벌어지는 것)의 정도, 골반의 크기 즉 분만을 위하여 골반의 안쪽 직경의 크기가 적정한지 여부, 아기가 내려와 있는지, 비정상 질출혈이나 양수 파수는 없는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내진과 함께 하는 복부 진찰을 통하여 태아의 크기에 대한 추정, 위치 확인을 하고, 임신부 부종 유무도 체크한다. 이런 내진 진찰과 복부 진찰을 묶어서 산과적 진찰(obstetric exam)이라고 부른다.
초음파가 발달하기 전의 과거에는 산모나 태아의 상태를 파악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산과 진찰이다.
지금은 초음파 등 의료 기술이 발달하여 내진이 과거만큼 큰 의미는 없다 하더라도 여전히 내진이 갖는 중요성은 가볍게 볼 수 없다.
30여 년 전 내가 대학병원에 근무하고 있을 때 지방의 어느 개인 병원에서 발생한 의료 사고에 대하여 전문가의 소견을 묻는 요청서가 법원에서 온 적이 있다. 물론 의과대학의 주임 교수님께 온 것이지만 실제 내용은 전공의들이 검토하고 답변 초안을 마련해서 교수님께 드린다. 마침 그때 내가 산과 수석의로 있기도 하여 내용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임신부에 대한 산과 진찰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좋은 예가 될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 본다.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제왕절개 수술을 받고 두 번째 아기를 임신한 산모의 남편이었다. 산모는 임신 전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복부 진찰을 받아 보지 않고 초음파 검사만 받았다. 초음파 검사를 할 때는 복부를 노출하기 때문에 이전의 제왕절개 흉터가 보였을 텐데 왜 간과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 초음파 실이 어둡고 해서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산모는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진통이 시작되었고 의사는 제왕절개의 과거력에 대하여 모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자연분만을 시도했다. 순산하였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산모는 진통 중에 자궁 파열에 의한 과다 출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전에 제왕절개를 한 자궁 부위가 약해서 파열된 것이다. 제왕절개 후 자연분만을 시도할 때 자궁 파열이 생기는 빈도는 1%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수술 방식이나 아기 상태 등 여러 가지에 따라 변동폭이 크다. 비록 1% 정도로 높은 빈도가 아니라도 그 결과는 태아의 사망이나 산모의 사망처럼 치명적이기 때문에 제왕절개 후 자연 분만은 시도하는 의사가 많지 않다. 더군다나 사례자의 경우 제왕절개 후 자연분만 시 생길 수 있는 자궁 파열에 대하여는 사전에 설명을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부족함은 지나침보다 못하다"
결국 이런 주의 설명 의무의 부족과 불성실한 진료로 인하여 산모가 사망한 것으로 보아서 남편이 소송을 제기했다. 그 뒤 이 사건에서 출산을 담당했던 의사 혹은 병원이 얼마만큼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결이 났는지, 어느 정도의 배상금을 물어주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나는 사망에 이른 주요 이유가 자궁 파열에 의한 과다 출혈이고 자궁 파열이 된 주된 이유가 이전의 제왕절개 병력이니 의사의 책임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술 담당 의사는 당연히 사전에 그런 내용을 파악해서 미리 제왕절개를 하거나 혹시 브이백 (제왕절개 후 자연분만)을 시도하는 경우라면 파열에 따른 사망 위험을 사전에 알렸어야 한다.
단 한 번이라도 복부를 진찰해 보았다면 큰 흉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던 제왕절개 병력을 모르고 결국 사망 사고까지 나게 하였던 일이라 지금도 기억한다. 단 한 번이라도 내진을 했다면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구했을 것이다. 요즘은 분쟁으로 가는 사례도 많고 배상액도 커서 그 정도로 소홀하게 산모를 보거나 설명을 하지 않는 의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진이라는 것은 산모의 극히 사적 영역과 관련되어 있고 수치심이 들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필요 없이 과도하게 시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수시로 내진하는 것은 산모에게도 불편한 일이지만 염증이 생길 가능성도 높아지게 되므로 태아에게도 해로울 수 있다. 내진뿐 아니라 관장과 제모도 마찬가지로 꼭 필요한 경우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만 내진이나 삭모, 관장 등을 굴욕 3종 세트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는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이는 모두 출산이라는 숭고한 순간을 안전하게 맞이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 속한 행위다. 모든 경우에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의료에서는 어떤 목적으로 한 행위인가가 중요하다. 목욕탕에 발가벗은 채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에 따라 조금 부끄러울 수 있지만 때를 씻기 위해서 옷을 벗는 것은 불가피한 행위다. 따라서 목욕탕 이외의 곳에서 그렇게 발가벗는 것은 부끄럽기도 하고 범죄가 될 수도 있지만 목욕탕에서만큼 그렇지 않다. 과유불급이라는한자 성어가 있다. 한자 문구대로는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의미인데 실질적으로는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오랜 기간 의료 분야에 종사하면서 나는 모자람보다는 오히려 지나친 것이 최악의 결과를 막은 경우를 종종 보았다. 내진의 경우 적절하게 하는 것이 제일 좋지만 한 번도 안 하는 것보다는 너무 자주 해서 다소 불편하더라도 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굴욕 3종 세트에 대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다.
"부족함은 지나침보다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