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느낌 혹은 감정보다는 냉철한 이성과 데이터로만 판단해야 할 때가 있다."
굴욕 4종 세트의 마지막 항목은 회음부 절개다. 회음부 절개는 출산하기 직전에 회음부를 일정 길이만큼 미리 절개하는 시술이다.
회음부 절개는 산도를 넓혀주어 아기가 쉽게 나오도록 돕고 회음부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봉합이 어렵게 되는 것을 방지할 목적에서 시행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항문까지 파열이 연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 물론 항문 파열을 예방하는 효과는 측면 절개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고 정중 절개의 경우에는 해당이 없다. 회음부 절개의 방법 중 정중 절개는 회음부를 수직으로 절개하는 방법으로 통증도 덜하고 봉합도 쉽지만 항문 파열의 발생 위험이 높다. 반면 측면 절개는 산후 회복 과정 동안 통증도 더 심하고 봉합도 더 어렵지만 항문 파열의 위험이 대폭 줄어든다. 회음부의 절개는 또한 방광류, 직장류, 자궁 탈출증(미주알 빠짐 현상), 스트레스성 요실금의 발생도 감소시킨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회음부 절개만으로 얻을 수 있는 장점은 아니다.
회음부 절개가 필요한 경우
어떤 때 회음부 절개를 할지는 의사마다 철학이 다르고 또한 산모의 의견을 참고해서 결정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질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태아가 클 경우
태아 얼굴이 하늘을 보고 있는 비정상 자세일 경우
겸자 분만이나 흡입 분만을 시도할 경우
둔위 분만을 하는 경우
회음부 길이가 짧은 경우
과거 인류에게는 회음부 절개라는 시술도 없었을 것이고 있었다 해도 지금만큼 필요성이 있는 시술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주로 앉아서 생활하기 때문에 골반은 상대적으로 좁아져서 골반과 회음부를 빠져나오기가 어려워졌다. 반면 영양 과잉으로 태아는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내가 처음 산부인과 전공의를 시작했을 때 막 태어난 아기의 평균 체중은 3.4kg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은 정확한 통계를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3.4kg보다는 훨씬 더 많이 나가는 아기들이 많다. 아마 3.5kg 내지 3.6kg쯤 되지 않을까 싶다. 걷거나 하는 등의 신체 활동도 줄어 들어서 회음부 근육의 탄력도 약해졌다. 이는 곧 회음부 파열이 잘 되고 나아가 항문까지 파열되기가 그만큼 쉽다는 의미다. 이래저래 회음부 절개의 필요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요즘은 자연적 진통 과정을 존중하는 분만에 대하여 산모들의 관심이 많아져서 회음부 절개에 대한 거부감도 과거보다 더 크다. 이런 점으로 하여 출산을 돕는 의사 입장에서는 회음부 절개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이 된다. 초산모의 경우는 회음부를 미리 절개하지 않더라도 아기가 산도를 빠져나오면서 파열되는 경우가 많다. 인위적인 절개를 한 경우보다 자연 파열의 경우에서 파열이 심하고 불규칙해서 봉합에 걸리는 시간이 긴 편이다. 봉합에 시간이 걸릴수록 출혈도 많고 염증과 같은 부작용이 생기기도 쉽다. 경산모의 경우에는 회음부 절개를 하지 않더라도 파열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예방적 회음부 절개의 빈도는 적다.
요약해서 회음부 절개에 대한 장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회음부 절개의 장점
절개 부위의 상처를 봉합하기가 쉽다.
출산 후 회음부 통증을 줄일 수 있다.
출산 후 골반 이완을 줄여서 요실금이나 질이완증을 줄일 수 있다.
항문까지 파열되거나 외음부가 지나치게 파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아기가 쉽게 나오도록 도와준다.
이런 회음부 절개의 장점이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회음부 통증을 줄여 준다는 점에서는 내 경험상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회음부 절개를 하지 않는 경우는 하는 경우에 비하여 다행히 파열이 경미하여 통증도 적고 봉합에 걸리는 시간이 매우 짧은 경우도 있디. 반대로 심하게 여기저기 파열되어 봉합도 불편하고 시간이 지체되어 미리 절개한 경우보다 훨씬 손해가 큰 경우도 있다. 심하면 항문까지 파열될 수도 있는 데 이런 항문 파열이 발생하면 그 후유증이 엄청나다. 항문과 직장 파열로 인한 질 직장 누공은 출산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부작용 중에서도 상당히 골치 아픈 부작용이다. 속된 말로 하면 회음부 절개를 하지 않는 경우 발생할 후유증은 모 아니면 도라고 말할 수 있다.
회음절개의 빈도는 외국의 경우를 보면 미국은 약 62%, 유럽은 30%, 우리나라는 확실한 통계는 없지만 90% 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회음부 절개를 하지 않아도 파열이 많이 되지 않도록 산전에 골반을 유연하게 관리하고 회음부 마사지를 하고 태아 머리가 급속히 하강하지 않도록 부드러운 만출을 시도하는 방법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개인차가 심하여했다고 반드시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했을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득이다. 의사로 살면서 내가 체득한 몇 가지 교훈은 첫째는 해서 손해가 나지 않는 것은 일단 해 본다는 것이고 둘째는 걱정할 것은 걱정할 일이 생기면 하고 그전에 미리 앞서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