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
몇 년 전 우리 병원에서 내가 출산을 도운 분 중에 출산 후 항문과 직장 일부가 파열이 된 분이 있었다. 점막과 근육층을 계층별로 일차 봉합하고 항생제와 변을 무르게 하는 약을 썼다.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는 별 이상이 없어서 출산하고 삼사일 후 퇴원하였던 분인데 그로부터 며칠 후 질 분비물에서 악취가 난다고 전화가 왔다. 순간 머릿속이 아득했다. 봉합한 부분이 결국 제대로 아물지 않고 질 직장 누공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아서다. 그렇게 되면 질 분비물에 변이 섞여 들어가서 악취가 난다.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희박하다.
정말 질 직장 누공이라면... 앞으로의 경과를 생각하니 불현듯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항문 파열
오래전 산부인과 전공의 시절에 옆팀의 산모 중 한 명이 출산 중 항문과 직장이 파열이 된 사례가 있었다. 그 산모는 프라이빗 산모 그러니까 교수님 특진 산모였다. 교수님께서는 파열 부위를 1차 봉합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질 직장 누공이 생겼다. 산모는 일반 외과로 전원 하여 누공을 제거하는 2차 봉합 수술을 받았지만 누공은 아물지 않았다. 질에서는 변과 가스가 계속 새어 나오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인공 장루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인공 장루란 대장을 절단하여 피부로 노출하여 변이 항문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수술이다. 인공 장루를 만들어 수개월간 질과 직장이 염증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3차 봉합을 할 수 있다. 질로 변이 계속 나오면 봉합하더라도 누공이 아물지 않는다. 그 과정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괴로운 기간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산모가 얼마 안 가서 자살하고 말았다는 소식이 병원 내에 퍼졌다. 나오하 주변 동료들 모두 상당히 놀랐던 사건인데 자살의 구체적 이유는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질 직장 누공으로 정신과 상담도 오랜 기간 받았다고 하는 점으로 미루어 우리들은 그분의 사망은 질 직장 누공이 주원인이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회음부 절개의 목적
예방적 회음부 절개 특히 측면 절개를 하는 이유는 항문 파열이 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서다. 이 산모는 정중 절개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측면 절개를 했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괜찮았을 가능성이 높다. 출산 중 직장 파열이 되는 경우는 0.1% 내지 1%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경우의 대부분은 정중 절개를 한 경우고 일부는 회음부 절개를 하지 않은 경우다. 누공이 생기는 것은 파열의 정도나 질염의 유무, 대장의 염증성 궤양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진통 중에 항문이 파열되면 일단 1차 봉합을 한다. 그러니까 파열된 항문 부분을 잘 소독하고 파열된 장점막 부분을 봉합하고 이어서 직장 근육증을 봉합한다. 마지막으로 질 쪽의 파열 부분을 봉합하면 끝난다. 이런 1차 봉합으로 파열 부분이 그대로 아무는 경우도 있지만 아물지 않고 상처가 벌어지면 2차 봉합을 시도한다. 2차 봉합은 파열된 부분을 다시 도려내고 봉합을 하는 것이다. 2차 봉합에서라도 회복되면 다행이다. 그러나 2차 봉합에서도 회복이 안되면 마지막 선택은 인공 장루 수술이다. 직장 파열이 되었다고 다 질 직장 누공이 생기고 인공 장루까지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직장 파열 후 1차 봉합에도 불구하고 누공이 생기는 사례는 5% 내지 10% 라고 알려져 있다
질 직장 누공은 죽고 사는 병은 아니다. 번거롭고 시일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수술을 통해 회복할 수 있으며 불치병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에게서 상징과도 같은 질에서 변이 나온다는 사실은 부부 관계에서 문제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산모의 자존감을 많이 훼손시킨다. 이 산모처럼 자살하는 경우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우울감에 시달린다.
사실 누공이다 생겼다고 해도 의사가 고의로 만든 것이 아니며 의사의 조치나 실력이 평균 이하 수준이라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경험이 많은 의사라도 해도 항문 파열 사례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항문 파열과 그로 인한 누공은 자연분만을 하게 되면 초래될 수 있는 부작용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산모와 가족들이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문제 제기 없이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만일 법정으로 가서 잘잘못을 따진다 해도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판결이 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상황에 따라 치료비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는 경우는 간혹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많은 의사들은 소송으로 가서 시달리는 것보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 대부분 합의로 마무리하고 만다.
내 빚을 만든 것의 5할은
30여 년의 산부인과 의사 생활 중 내가 출산을 담당한 산모 중 항문 파열이 된 사례는 대략 7건 정도다. 모두 1차 봉합을 하였고 그중 4명은 질 직장 누공이 발생했다. 2차 봉합에서 회복된 한 분을 제외하고 인공 장루 시술을 한 경우는 3건 정도 기억이 난다. 대학병원 일반 외과로 전원 하여 수술을 받았다. 2분이 문제를 제기하였고 질 직장 누공에 대한 치료비로 한분은 1백여만 원, 한분은 5백만 원 정도가 나왔다고 하여 그 액수만큼을 합의금으로 지불했다.
합의금을 지불하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의료에서 원치 않는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에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산모와 가족이 스스로 감당해야 하나? 아니면 의료 과실의 유무와 관계없이 처치와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가 져야 하나?
정답이 따로 있지는 않다. 다만 진료비와 치료비를 국가가 관여해서 정해둔 사회 보험 방식을 택하고 있다면 국가가 일정 부분 책임을 지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 의료 체계는 그런 방식이다. 의료 분쟁으로 인한 배상금이든 합의금이든 국가가 배상하지 않는다면 그런 비용을 의료비에 반영하여 정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의료비를 미국과 같은 자유 시장 경제 방식을 택한 나라와 다르게 이런 분쟁 관련 배상금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런 불합리한 점에 대한 원망이 마음 한편에서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순산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바라지 않은 부작용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출산을 도운 의사에게 치료 비용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섭섭함도 있다. 이런 것들이 쌓여 병원의 경영 상태를 나쁘게 만들고 의사로 하여금 소신 진료를 하기 어렵게 만든다.
서정주 시인은 스물세 해 동안 그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시에서 말했는데 내가 지금까지 진 빚의 5할은 이런 분쟁 배상금 혹은 합의금이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