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한 일에 대해 때때로 누군가는 그것을 잘못이라고 부른다."
의료는 선택의 문제
의료 행위를 하다 보면 둘 중 하나 또는 몇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치료법을 택할 것인가 저 치료법을 택할 것인가? 수술을 먼저 할 것인가 아니면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를 먼저 할 것인가? 숱한 선택의 기로에서 고려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질병의 완치율이다. 환자가 겪는 육체적 대가 즉 침습의 정도는 어떤지, 통증과 같은 부작용은 얼마 큼인지 하는 것도 고려 사항 중 하나다. 물론 환자가 져야 하는 경제적 부담도 고려 사항이지만 일순위는 아니다.
출산 직전 회음부를 절개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한다면 측면 절개를 할 것인지 정중 절개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 경우에 어떤 의사는 산모가 느낄 통증을 감안하여 절개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정중 절개를 하고 어떤 의사는 항문과 직장의 파열을 줄이기 위해 측면 절개를 선호한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후자다. 내가 경험한 항문 및 직장 파열은 거의 대부분 정중 절개할 때 생겼다. 일부는 회음부 절개를 하지 않은 경우에서 생겼지만 측면 절개에서는 한 번도 생긴 적이 없다.
그러나 측면 절개는 출산 후에 산모가 느끼는 회음부 통증이 심하고 봉합 과정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흉터도 정중 절개 때보다 더 선명하게 남는다. 측면 절개는 항문 파열을 예방한다는 장점 말고는 정중 절개나 절개를 하지 않는 것에 비하여 전혀 장점이 없다.
나는 경산모이거나 초산모이더라도 질이 넓고 태아가 크지 않은 경우 절개를 하지 않거나 혹시 해야 하는 경우 정중 절개를 하지만 그런 산모는 많지 않다. 나는 거의 90% 이상 측면 절개를 한다. 정중 절개를 할 때마다 과거 항문 파열로 인공 장루를 하고 고생한 산모의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산모가 느낄 통증보다 부작용 특히 질 직장 누공과 같은 심각한 부작용이 더 무섭다. 수술이나 처치 등 내가 하는 모든 의료 행위에서 나의 선택 기준은 어느 것이 더 무서운가이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회복 불가능한 악결과는 과연 어느 것이 더 적은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그 점은 아마도 모든 의사가 비슷하겠지만...
어린 시절 덩치가 큰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의 위협에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히 대들곤 했던 것을 보면 나는 원래 겁이 많았던 것 같지는 않다. 얼굴에 생긴 화상 흉터로 험상궂어 보이는 인상도 한몫했겠지만 이런 깡다구가 있어 나는 소위 말하는 일진들에게 빵셔틀이나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보니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화벨 소리 공포증도 의사가 되기 전에는 없었던 증상이다. 이런 겁쟁이 현상은 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생긴 부작용 임에 틀림없다. 내가 시행한 어떤 행위 (작위)로 인해 혹은 해야 하는 행위를 하지 않음 (부작위)으로 해서 한 생명이 스러져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견디기 쉽지 않은 일이다. 질 직장 누공은 생명의 상실만큼은 아니지만 산모에게든 의사에게든 상당히 고통스러운 악결과다. 산다는 것은 그저 생명의 존속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계 보건 기구에서는 건강에 대해 "건강이라는 것은 완전한 육체적, 정신적 및 사회적 복리의 상태를 뜻하고, 단순히 질병 또는 병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정의했다.
그 정의처럼 질병에 걸리지 않고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한 가운데 삶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이의 소망이다. 내가 전혀 상관이 없는 어떤 이가 생명이나 건강을 잃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 그런 과정의 한가운데 내가 있다면 정말 견디기 쉽지 않다.
학창 시절에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를 읽었다. 자세한 내용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기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노력한 주인공의 모습은 잊히지 않고 뇌리에 남았다. 그 책의 대사 중에 "내가 옳다고 느끼는 길을 갈 때조차, 늘 누군가는 그것을 죄라 부른다."라는 문장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의사로서 한 일들 특히 결과가 나빴던 경우에 다른 누군가는 내가 한 그 선택이 문제이고 내가 한 처방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대부분 돈이지만 무엇으로 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방어적 진료를 하지 않는 것이던 과잉 진료를 하지 않는 것이던 의사가 원칙에 따른 교과서적인 진료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소신은 비난이나 지적에 대해서 당당히 맞서는 용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비록 원치 않는 악결과가 나온 경우에도 그 선의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은 환경에서 나온다. 모든 잘못과 실수에 대하여 용서나 이해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한 평균 이상의 진료를 하였고 어떤 행위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악결과의 경우 그렇다는 이야기다.
소신 진료는 상호 신뢰가 없다면 할 수 없다. 이 의사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것이라는 환자의 믿음, 비록 원치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의사가 최선을 다했을 경우 환자가 이해해 줄 것이라는 의사의 믿음이 그 바탕이다.
피가 무서우면 산부인과 의사 그만할 때
똥이 더럽게 느껴지면 외과 의사를 그만둘 때가 된 것이고 피가 무서워지면 산부인과 의사를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된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항문이나 대장을 주요 진료 과목으로 하는 외과 의사가 똥이 더럽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의사로서는 자격 미달이다. 산부인과는 특히 출산을 돕는 산과 의사는 피를 보는 일이 숱하게 많다. 어지간한 양의 피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출산 중에 정상적으로 나오는 출혈이 400cc 정도인데 이는 우리가 한번 헌혈 때 뽑는 피의 양과 같다.
그러나 처음 산부인과를 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피가 무섭다. 산과 의사로서는 자격 미달임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스카이 다이빙 선수가 된 셈이다. 나는 질 직장 누공도 무섭다. 나는 양수 색전증도 무섭다. 나는 신생아의 뇌성 마비도 무섭다. 나는 모든 악결과가 무섭다.
그렇게 나는 새가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