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삶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과정"
책을 읽다 보면 감명을 주는 첫 문장들이 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 박사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은 "삶은 고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친하게 지냈던 치과 선생님이 선물해 준 책이었지만 너무 두꺼워서 나는 그 책을 다 읽지 못했다. 다만 선물해 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가끔씩 찔끔찔끔 읽었다. 그러다 보니 첫 문장만 수도 없이 많이 보게 되었다. 나는 원래도 삶이란 것이 행복의 추구라기보다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하는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스캇 펙 박사의 책은 그런 내 생각이 더 확고해지도록 만들었다.
"내 직업은 의사"
의사가 있는 곳은 환자나 산모의 옆이다. 환자든 출산하는 산모든 아픈 사람들 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삶이 쉬울 리가 없다. 어떤 누구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똑같은 정도로 두려움과 아픔을 느낄 수는 없지만 옆에 있다 오래 있다 보면 느껴지는 그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다. 공감력이 상당히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조차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혹자는 사명감이라고 부르기도 하겠지만 그것과는 좀 다르다. 의사가 되는 순간 이마에 찍히는 낙인과도 같은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의업의 무게와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에 가깝다.
의료 행위는 항상 계획한 대로 원하는 대로 결과가 이루어지진 않는다. 원치 않게 초래된 나쁜 결과는 환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의사에게도 상당한 고통을 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삶은 고해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는 다소간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나도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경우가 생기면 그 말을 해 주곤 한다. 물론 스캇 펙 박사처럼 정신과 의사로서의 오랜 경험과 인격적 성숙을 가진 사람이 해 주는 조언이 아니라 그리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
스캇 펙 박사는 책에서 고통을 이겨내고 성장해 나가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것
둘째,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
셋째, 진실에 헌신하는 것
넷째, 균형을 맞추는 것
그러나 내가 진료 현장에서 마주한 고통의 경우 이런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숱한 분쟁에서 박사의 조언이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지만 삶이란 것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순간 짐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나는 4번 개원을 했다.
의사가 동시에 여러 병원을 개원할 수는 없는 일이니 개원을 4번 했다는 것은 이전에 3번 폐원을 했다는 뜻이다. 폐원하기로 한 결정은 내가 선택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때마다 내 마음은 괴로웠고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워싱톤 의과대학의 토마스 홈즈 교수는 살면서 사람이 겪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스트레스 정도에 따라 100점을 최고점으로 하여 순위를 매겼다. 배우자의 사망이 100점으로 1위였고 2위는 73점인 이혼이 차지했다. 해고는 47점으로 8위다. 폐업에 대하여 따로 스트레스 지수는 없지만 폐업은 해고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해고보다 오히려 스트레스 지수가 높으면 높지 적지는 않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개원했다."
톨스토이는 그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라고 썼다. 이 문장 역시 그 소설의 첫 문장이다. 폐원과 개원을 반복할 때의 나의 상황이 딱 그랬다. 3번의 폐원은 그 이유가 모두 다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지금 이야기하려고 한다. 반면 4번씩이나 한 개원은 그 이유가 모두 같다. 돈을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다.
내가 많은 빚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내가 돈에는 관심도 없고 돈을 버는 행위를 혐오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나도 돈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군복무를 대신한 지방 의료원 근무를 마치고 삼성 의료원에 1 년쯤 봉직하다가 개원한 이유도 솔직히 말하면 돈 때문이다. 삼성 의료원 시절 일이 너무 힘들어 몸이 못 버티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렇게 힘들 바에야 개원해서 힘든 만큼 돈이라도 벌면 덜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분만 의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주는 스트레스를 평생 감당하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한 10년쯤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벌고 그 이후에는 외래 진료만 하면서 쉬엄쉬엄 살고 싶었다.
그런 내 계획은 빗나가서 지금까지도 출산을 돕는 분만 의사로 살고 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내 체력이나 유리 멘털이라고 자평하는 내 정신력으로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가 엄청난 분만 의사를 30년 이상 버텨왔다니 나로서도 놀라울 뿐이다. 나는 지금도 돈을 좋아하고 할 수만 있다면 돈도 많이 벌고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능력이 안되어 돈을 못 벌고 가난한 빚쟁이 의사가 되었다.
어떤 업종이든 문을 닫고 폐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마음이 많이 힘들게 마련이다. 병원을 폐원하는 일도 역시 괴로운 일이다. 망하는 것이 흔치 않은 의료계에서 얼마나 능력이 없고 불친절했으면 병원이 망했을까 하는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뜨내기손님을 상대하기보다 거의 단골 고객에 의존하는 병원 업종의 특성상 폐원은 그동안 잘 형성해 놓은 단골을 한 순간에 잃게 만든다. 의사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처지에 무얼 해서 먹고 살 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3번씩이나 병원을 폐원했다.
그 폐원이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지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지금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내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고도를 기다리며"
지금은 4번째 개원 중이다. 아직 진행형이며 4번째 폐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지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일지 어떨지는 모른다. 미래는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나 아마도 그리 먼 미래의 일은 아닐 것이다. 나의 운이 나빠서든 혹은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부족해서든, 아니면 의료 시스템의 문제나 출산율 저하라는 사회 현상 때문이든 그것은 언젠가는 온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연극이 끝날 때까지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고도가 무엇인지도 베일에 가려있다. 그러나 나의 4번째 폐원은 반드시 온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때 내가 어떤 기분이 들지는 잘 모르겠다. 슬픔이 묻은 눈물 한 방울을 흘리게 될지 아니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안도의 숨을 쉬게 될지...
5년 전에 "어느 분만 의사의 1년"이라는 다큐멘터리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다큐멘터리에서 주연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여하튼 내 이야기가 주요 소재였다. 그때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PD 님은 원래 내가 병원 간판을 내리는 날까지 틈틈이 촬영을 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말하자면 가족과도 같았던 한 마리의 소가 어느 노부부의 집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하다 죽는 순간까지를 담은 영화 "워낭 소리"처럼 말이다. 물론 죽는 것은 소가 아니라 병원이라는 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폐원을 하기 전에 갑자기 촬영 일정이 잡혀 어쩌면 미완인 채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져 방송에 나갔다.
내가 만일 다시 나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는 날이 올지 어떨지 모르지만 혹시 찍게 된다면 그때는 "어느 분만 의사의 40년"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1990년에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고 2030년이면 40년이 되는 해이니 앞으로 불과 5년밖에 남지 않았다. 병원 간판을 내리는 모습이 미래의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이 될 것이다. 소는 죽어서 워낭을 남기지만 나는 병원을 폐원하고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돈은 아닐 것이고 이름일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꼭 내 맘대로 골라 하나를 남길 수 있다면 의료에 대한 평소 나의 철학이 남았으면 좋겠다.
"의사란 착한 사람도 아니고 위대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한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것들은 사람이건 물건이건 망가지지 않도록 잘 지키는 것이 국가와 사회의 의무다."
어느 날인가 내가 병원 간판을 내리는 날, 나이가 들었을 테니 이미 몸은 많이 망가진 상태겠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건강하고 의업을 즐거운 소풍 같은 것이었다고 기억하게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