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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그깟 검사가 무엇이기에-첫 번째 폐원

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by 팔랑심

"미숙한 인품과 급한 성격은 최악의 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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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이 어려우면 병원도 폐업할 수 있다. 병원도 자유 시장 경제 하에서 엄연한 경제 논리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보통 6개월에서 1 년 정도 운영해 보고 희망이 없다 판단되면 병원을 폐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벌어 놓은 돈이 많아 놀고먹어도 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폐원하고 나서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개원하거나 큰 병원의 봉직의사로 들어가는 것.
한 지역에서 3 년 이상 운영을 했다면 대체로 어느 정도 운영 기반은 갖추었다고 봐도 좋다. 그러므로 의료 사고나 원장의 건강 이상과 같은 아주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몇 년 동안이나 운영하던 병원을 폐원하는 일은 드물다. 그럼에도 나는 5년 차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평구에 개원했던 산부인과를 폐원했다.


도대체 왜?

처음 개원한 곳은 은평구의 응암 5 거리였다. 지금 개원하고 있는 곳이 동교동 3거리이니 내 개원지는 로터리와 인연이 깊다. 삼성 의료원에 1년가량 봉직하다가 내 길이 아니라고 판단해 그만두고 나와서 1995 년도 봄쯤 바로 개원했다. 그곳에서 5년 동안 심상덕 산부인과라는 이름으로 분만을 주 진료 분야로 병원을 운영했다. 혼자서 365일 외래와 분만을 담당했지만, 젊어서 그런지 힘들다는 생각이 그다지 많이 들지는 않았다. 3 층 단독 건물에, 1층은 외래, 2층은 분만실과 수술실, 병실이 있었고 3층에 우리 가족의 살림집을 꾸렸다.

그때는 막내딸이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큰 딸과 아들까지 4 식구가 3층에서 살았다. 3층의 살림집으로 올라가려면 분만실이 있는 2층을 지나야 했는데 때때로 복도로 진통 산모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들에게는 결코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큰 딸과 아들 막내 모두 의료계와는 거리가 먼 분야를 직업으로 택한 것은 그때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공부를 아주 잘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출퇴근 시간이 1분이라는 것은 큰 장점이다. 아내도 병원일을 열심히 도와준 덕분에 그럭저럭 병원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직원들의 이직이 잦아서 아내는 간호조무사 자격도 땄다.
아내는 접수 업무와 상담을 주로 맡았지만 사람이 부족할 때는 분만이나 제왕절개에도 보조로 참여했다. 청소와 세탁을 해 주시는 도우미 분이 안 계실 때는 피가 묻은 분만포나 수술포도 아내가 직접 빨았다. 병원에서는 나의 역할보다 아내의 역할이 더 큰 컸다. 직원들도 "박실장님" 하고 부르면서 나보다 아내를 더 따랐다.


그 당시 건물은 보증금 1억에 월세 500만 원으로 임대했다. 지방 의료원에서 보낸 군 대체 복무 기간 동안이나 삼성 의료원에 있는 동안 보수가 얼마 되지 않아 모아 놓은 돈이 없었다. 보증금이나 의료 장비의 구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송파구의 아파트를 처분했다.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높았을 때도 아니고 십여 평 밖에 안 되는 작은 아파트라 큰돈을 받지는 못했다. 처음으로 가졌던 내 집이었지만 팔면서 아쉽고 허전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개업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더 좋은 집을 사면 된다는 착각 탓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 집이 내 명의로 소유했던 유일한 집이다.

그때 개업의로 살기로 한 나의 선택에 대하여 가족들이나 친구들 모두 찬성하지 않았다. 나는 누가 봐도 개업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근거 없이 자신감이 넘쳤고 경제관념은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가족들은 독불장군을 이기지 못했다. 그저 아들이 잘 되기를, 남편이 잘 되기를, 사위가 잘 되기를, 아빠가 잘 되기를 온 마음으로 빌었다. 병원 진료를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께서 돼지 머리를 사가지고 오시어 고사를 지냈던 기억이 난다. 돼지주둥이에는 만 원짜리도 몇 장 물렸다.
나는 이런 미신 같은 것은 왜 하냐고 싫은 내색을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소원이시라 마지못해 절을 했다. 어쩌면 그런 가족들의 염원 덕분에 그나마 험한 일을 덜 당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도 무주택자의 신세가 되었다. 그 이후 20여 년쯤 지나 아내가 장인어른으로부터 강동구의 작은 아파트를 한채 증여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내 명의로 내가 소유한 집이 아니라 정확히 언제 받았고 얼마 정도 가격인지도 잘 모른다. 그래도 비록 아내의 집이긴 하지만 덕분에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우리 가족이 들어가 살 집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외래 환자도 지금보다 많았고 분만도 한 달에 20여 명에서 30여 명 정도로 있는 편이라 그때가 내가 산부인과 의사로 지내면서 유일하게 빚이 없던 시절이다. 약간씩 저축도 할 수 있어서 이대로만 살면 아무 문제없겠다고 생각했다. 외래를 마친 저녁이면 병원 옥상에서 가족들, 직원들과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아내와는 병원 근처에 있는 곰장어 집도 자주 이용했다. 덕분에 내 뱃살은 점점 두꺼워졌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되돌아서 생각해 보면 그때가 그래도 내 인생에서 행복한 시절이었다.


병원을 개원하고 한 3년인가 4년쯤 되었을 무렵 아내가 셋째를 임신했다. 계획에 없는 임신이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고민 끝에 출산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꾸었던 분홍색 돼지꿈은 주택복권 당첨 대신 우리 가족의 막내딸로 찾아왔다. 출산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던 아내는 내가 병원 운영에 집중하고 좀 더 가정에 충실할 것을 부탁했다. 아니 부탁이라기보다 출산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당시 적자 운영은 아니라 조금씩 저축을 했지만 노후를 보장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준은 아니라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막내를 낳았다. 살면서 내가 한 선택 중 잘했다고 생각하는 선택이 매우 적은데 그중 하나가 그때의 선택이다.


"병원 문을 닫았다"
살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갑자기 생긴다. 막내의 임신도 그랬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개원하고 5년쯤 되었을 때다. 한창 더운 8월 15일 연휴 기간, 아내와 아이들은 서해안으로 휴가를 떠났다. 나는 분만 산모를 지켜야 해서 혼자 병원에 남았다. 그때 연휴 기간에 외래 진료를 받던 산모의 보호자와 언쟁이 생겼다. 그 결과로 병원을 폐원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첫째 아기를 우리 병원에서 출산한 산모였다. 첫째 아기 출산 때 진통 과정이 길고 험난한 난산이었지만 자연분만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최선을 다해 도왔다. 다행히 자연분만에 성공했다. 그 산모가 둘째 아기를 임신해서 산전 진료를 위해 욌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시행하는 산전 진찰과 여러 검사를 잘 받았다. 참고로 임신 중에 하는 검사들은 시기가 정해져 있는데 다음의 것들은 거의 대부분 병원에서 필수로 시행하는 검사들이다. 물론 초음파 검사는 이 목록에 있는 것보다는 더 자주 시행이 되는 편이다.


임신 5주나 6주: 초음파 검사

임신 7주나 8주: 초음파 검사, 초기 산전 검사, 자궁암 세포진 검사, 성감염증 검사

임신 12주: 초음파 검사, 목덜미 투명대 측정, 통합 기형아 검사 1차 혹은 더블 마커 검사

임신 16주: 초음파 검사, 통합 기형아 검사 2차 혹은 쿼드 마커 검사

임신 24주: 초음파 검사, 임신 당뇨 검사

임신 36주: 초음파 검사, 분만 전 검사


이 산모는 7주까지의 검사는 잘 받았고 다른 산모들처럼 평범하게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다 사건이 터진 것이 임신 16주의 기형아 검사 때였다. 그때는 기형아 검사로 통합 검사나 쿼드 검사는 없었고 트리플 마커 검사가 널리 시행되던 시기였다. 초음파 검사를 비롯하여 이런 산전 검사들은 병원에서 한다. 그런데 그 산모는 보건소에서 트리플 마커 검사를 해서 왔다. 지금이야 보건소에서 여러 산전 검사를 무료로 해주고 있어서 산모들 중에는 보건소에서 검사한 결과지를 가지고 오는 분도 드물지 않다. 그럴 경우 보건소 검사에서 누락된 검사나 이상이 있는 검사만 병원에서 다시 검사할 뿐 전체 검사를 다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보건소에서 산전 검사를 하지 않는 곳이 많았고 일부 보건소에서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정보도 대부분 산모들은 몰랐다. 모든 보건소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보편적이지도 않아서 병원에서도 보건소에서 검사를 해서 오라고 안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산모는 그런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 보건소에서 트리플 마커 검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병원에서는 따로 검사를 안 받겠다고 했다. 병원에서 권하는 여러 검사들의 비용이 아까워서 사전에 양해도 없이 보건소에서 검사하고 왔다는 사실에 약간 기분이 상했다. 즉 나의 권고나 처방이 무시되었다는 기분이 들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아직 나이도 젊고 인격이 미성숙했다. 지금도 인격은 미성숙하지만 그때는 아마 지금 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사실 굳이 변명하자면 우리 병원의 수가가 나름 저렴한 편이기도 했고 첫아기 출산 때 정말 진을 다 빼가면서 최선을 다해 도왔는데 기형아 검사에 드는 비용조차도 아까운 마음이라니 서운한 마음이 컸다. 지금도 무뚝뚝한 말투에 표정도 거칠고 속의 마음도 잘 감추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 속마음이 감추어지지 않아 말투가 거칠게 나갔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병원에서 권하는 간단한 검사도 비용이 아까워서든 보건소에서 해서 오시겠다면 앞으로의 검사나 진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그러려면 차라리 보건소에 다 검사하고 출산을 대학병원에 가서 하는 것이 좋겠다는 투로 말했다.


내 말로 하여 임신으로 예민해진 산모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화를 내면서 더 이상의 진료를 거부하고 병원을 나갔다. 그리고 한두 시간 후 산모의 동생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신의 말로 인해 내 누나가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 당신처럼 돈이나 밝히는 의사는 병원을 하면 안 된다"
전화로 긴 언쟁이 이어졌는데 대략 그런 내용이었다. 8월 15일 한참 더울 때였는데 날씨보다 내 마음속 불길이 더 컸다. 아마 산모와 가족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 언쟁으로 하여 분을 참지 못한 나는 그날로 병원을 폐원하기로 결심했다. 휴가를 떠난 아내에게는 전화로 병원 폐원 소식을 알렸다.

당시의 일과 관련하여 내가 후회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산모에게 상처 준 말을 한 것
둘째는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병원을 폐원한 것
셋째는 아내와 일체의 상의도 없이 혼자 중대한 결정을 했다는 것


지금은 보건소에서 할 수 있는 검사는 해 와도 된다고 안내하고 있다. 의사인 나의 조언을 무시한 것이 기분이 상했다면 아예 처음부터 그런 선택지를 주면 나로서는 기분이 상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정한 방침이다. 물론 검사에 따르는 약간의 수입은 포기해야 하겠지만 그 수입이라는 것이 대단히 큰돈도 아니다. 그런 작은 돈에 나의 자존심을 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 내가 조금만 현명했다면 자존심도 지키고 병원도 폐원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숙한 인품과 급한 성격으로 병원을 폐원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고 후회스럽기만 한 나의 첫 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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