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진실을 깨닫지 못하면 대가를 치른다."
[봄산부인과 로고]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그 김에 몇 달간 놀면서 친구 부부와 인도네시아 발리로 며칠간 여행도 갔다. 앞으로 무얼 해서 먹고살지 걱정이 많았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마음 편히 놀아 보겠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몇 차례 간 해외여행 중에서 학술적인 이유 말고 오로지 휴가로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떨지는 모르지만 아마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대문구 봄 산부인과 개원"
이후 의사를 안 하고 싶었지만 배운 도둑질이라고 결국 다시 산부인과를 개원했다. 개원지는 은평구 옆 동네인 서대문구였다. 역시 로터리인 유진상가 4거리에서 봄 산부인과를 개원했다. 7층 건물의 2층 전체를 임대하였고 건물이 넓어서 병실과 분만실을 모두 같은 층에다 두었다. 그리고 그때가 서서히 산후조리원이라는 것이 생길 무렵이어서 7층을 임대하여 방 13개짜리의 자그마한 규모로 산후조리원도 열었다. 조리원 운영은 아내가 맡았다.
2년쯤 지나자 혼자 하는 분만이 너무 힘들어서 산부인과 의국 3년 후배인 남자 의사와 동업했다. 그때 봉직 의사를 두었어도 되는데 왜 동업하기로 결심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 봉직 의사보다는 동업 의사가 더 책임감 있게 일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선입견 탓이었다고 추측한다.
1년쯤 그럭저럭 운영하다가 둘이 하기에는 진료 공간이 비좁기도 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운영을 하기 위하여 병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5층의 단독 건물로 이전했다. 지하부터 5층까지 건물 전체를 임대했다. 이전에 운영했던 조리원은 그만두었다. 대신 새로 이사한 5층 건물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채용하여 소아청소년과도 개설했다. 얼마 있다가 후배 산부인과 여의사도 한 명 더 동업자로 합류했다.
서대문구의 봄 산부인과에서는 월분만 평균 50여 건 정도 하였지만 직원의 숫자도 많고 하여 운영 자금이 많이 들었다. 동업으로 3명이 수입을 나누다 보니 별로 남는 것이 없었다. 그 와중에 의료 분쟁건이 더해지면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서 빚이 생겼다. 의료 분쟁은 그동안 몇 차례 있었지만 출산 후 과다 출혈이나 혈종과 같은 것으로 산모나 아기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될 사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봄산부인과를 개원하고 있는 동안에 생긴 의료 분쟁은 사안이 좀 심각했다. 내가 출산을 도운 아기가 뇌성마비가 되었다. 이전에 내 아기를 죽여주세요 했던 그 사건이다. 합의금으로 1억 5천만을 썼고 변호사 비용은 따로 수천만 원이 들었다. 2004년 7월이었다.
그 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견 차이로 남자 의사와 여자 의사와 3명이 함께 했던 동업을 해지했다. 이후부터는 봉직 의사로 있던 소아청소년과 선생님 1명과 나까지 두 명이 큰 봄 산부인과 소아과를 이끌어 나갔다. 동업을 해지하면서 각각 동업자에게 5억 원 조금 넘는 돈을 토해 내야 했다. 또 빚이 늘었다. 혼자서 경영을 하니 진료 방식에 대해서든 수가에 대해서든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서 마음은 편했다. 동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병원 경영에서 손을 뗐던 아내는 동업을 해지하고도 더 이상 병원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나와의 의견 차이로 분란과 갈등만 생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자서 365일 병원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몸이 힘들었다. 밑에서 물이 새어 올라오는 배에 혼자 타고 망망대해를 정처 없이 헤매는 영화처럼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아기 뇌성 마비"
불행한 일은 몰려서 온다고 했던가?
2005년 3월, 아기 뇌손상 사건이 또 생겼다. 이번에는 난산이기는 했지만 크게 무리가 없는 출산이었고 출산 과정에서 내가 주의를 소홀히 하거나 설명을 부실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없었다. 아기의 울음소리도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아기 호흡이 다소 좋지 않은 편이라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결정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아기가 뇌성 마비 소견이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보호자와의 실랑이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의료 사고 소식이 외부로도 알려져서 병원 홈페이지에는 항의의 글이 매일 수백 건씩 올라왔다. 수도 없는 악플을 보고 있으면 홈페이지 서버를 닫고 싶은 마음도 많이 들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서대문구 의사회 정보 이사를 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고 관리한 적이 있다. 그때 서대문구 관내의 어떤 병원에 대한 민원 글이 올라왔다. 그런 내용을 알고 해당 병원의 원장님께서 내게 그 글을 삭제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나는 홈페이지에서 글을 내리기보다는 오해를 풀 수 있도록 홈페이지에서든 유선으로든 글쓴이와 대화하기를 조언드렸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서대문구 의사회 홈페이지가 아니더라도 항의할 곳이 많았을 텐데 여기에 글을 남겼다는 것은 오해를 풀 단초가 되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말씀드렸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고 내가 한 말도 있어 나는 홈페이지를 닫지 않고 꿋꿋이 열어 두었다. 신생아 뇌성마비가 꼭 의사의 잘못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나로서는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 보호자의 무리한 합의금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욕설이 난무하는 글을 하루에도 수없이 읽으면서 결국 가입해 둔 배상 보험회사에 나온 손해사정인이 중개하여 합의를 했다. 합의금은 3천만 원이었다. 내게는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지금은 이런 합의금도 액수가 많이 올랐다고 들었다. 최선을 다해 분만을 도왔지만 원치 않게 악결과가 나오게 된 경우 그 결과에 대해 의사의 잘못을 묻는 세태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왜 산부인과를 선택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한 선택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 길은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일까?"
그 사건이 두세 달쯤 지났을 때 도저히 더는 병원을 운영할 정신적 여력이 없었다. 결국 병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2005년 4월 그렇게 2번째 폐원을 했다.
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에 해당하는 권리금 17억 원으로 인수 계약을 체결하고 돈을 받았다. 은행에는 대략 10억 원쯤의 빚이 있었다.
이때 받은 보증금과 권리금으로 은행 빚을 갚고 봉직 의사로 일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빚쟁이 의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은행 빚은 일부만 갚고 다시 개원을 했다. 그때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 길이 내 길이었다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는 속말이 있는데 산부인과 분만 의사의 길이 아직 죽은 자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개원한 응암동 산부인과에서는 인테리어랄 것도 없이 대충 무너진 천장 정도만 수리를 하고 진료를 했다. 그러나 유진상가에 봄 산부인과를 개원했을 때나 홍제동에 이전 개원했을 때는 빈 공간에 병원을 꾸미는 것이라 인테리어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인테리어를 할 때 사용하는 자재는 고급 자재를 썼다. 흡사 영원히 이곳에서 진료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테리어에 드는 자금은 병원을 넘기는 경우 권리금으로 받기도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전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손실 비용이 된다. 따라서 자기 건물도 아닌 곳에 아니 설사 자기 건물이라도 인테리어에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그때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고 마음속에는 후회로 남았고 은행에는 빚으로 남았다.
그런 비용을 회수하는 것은 진료 수입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다른 자영업도 마찬가지지만 영업을 해서 많은 이익을 남기면 된다. 그러나 병원에서 의사가 하는 진료의 내용은 의학적 진단이나 처치이고 대상은 건강을 잃은 환자들이다. 최소한의 비용만 지불하고 건강과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 그러나 병원도 운영해야 하고 재투자도 해야 하므로 무조건 저렴하게 받을 수는 없다. 건물의 임대료, 직원의 인건비, 인테리어나 장비의 구입과 같은 초기 투자 비용, 그리고 운영해 나가면서 드는 여러 잡비가 뭉뚱그려져서 비용이 된다. 임대료는 건물주가 정하는 대로 따라서하는 것이라 사실 조정하고 말고의 융통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테리어도 최소한, 의료 장비도 가능하면 최고급 수준만 고집하지 않는 타협의 자세가 필요하다. 남의 돈으로 자선 사업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모두 빚이 된다. 그리고 그 빚은 없어지기 전까지는 나를 짓누르는 짐이 되어 마음을 힘들게 한다.
나는 이런 진실을 두 번째 폐원에서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깨닫지 못한 탓에 내 짐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