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동업의 바탕은 신뢰, 결혼의 바탕은 사랑"
[진오비 산부인과 로고]
3번째 개원은 지금 있는 마포구 동교동 3거리에 했다. 2005년 8월이다.
개원은 먼저 받은 17억에서 은행 빚 중 반인 5억을 갚고 남은 12억 원으로 준비했다. 7층 건물 중 2층과 3층 두 층을 보증금 5억에 월세로 1600만 원에 임대했다. 두 층 합해서 250평 정도 되는 공간에 평당 200만 원 정도로 인테리어를 하니 5억 원쯤이 들었다. 남은 2억 원으로 의료 장비를 구입하고 모자란 것은 리스를 통해 마련했다. 그곳에서 처음 정한 병원 이름은 온산부인과다. 온이라는 단어는 항상 켜져 있다는 의미도 있고 따뜻하다는 의미도 있어서 골랐다. 물론 따뜻함과 나는 거리가 멀었지만 내가 엄청 무뚝뚝한 성품이니 병원 이름이라도 따뜻하게 지어 보려는 무의식의 발로였을지 모른다. 일반 부인과 진료와 산전 진찰을 하고 분만을 도왔다.
개원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병원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산부인과 의사회 임원으로 참여하여 대외 활동을 시작했다. 의사회 활동을 하면서 산부인과 의사들이 유방 분야로 진료 영역을 확장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그리고 나도 유방 진료를 병행했다. 그때 의사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여의사와 인연이 닿아 동업까지 하게 되었다. 여의사와의 동업이라 사실 아내는 탐탁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부인과 진료를 받는 사람들이 점차 남자 의사보다 여자 의사를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해해 주었다.
"아이온 산부인과 개원"
동업하면서 병원 이름을 온산부인과에서 아이온 산부인과로 바꾸었다. 아이가 온다는 의미를 담았다. 여의사는 난임이 전문이었고 나는 분만이 전문이어서 둘의 공통점이 아이의 출산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둘이 동업을 하는 동안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빚이 더 늘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2008년 산모와 아기가 동시에 사망하는 의료 사고가 발생했다. 의료 사고 중 최악의 경우였다. 병원 앞에서 가족들이 꽹과리를 치고 살인마는 물러나라는 팻말도 보였다. 외래 진료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부검 결과는 양수 색전증에 의한 심장 정지로 나와서 다행히 의사의 과실은 없는 것으로 나왔다. 형사 입건되지는 않았지만 분쟁으로 상당한 기간 시달렸다. 이전 글 "지옥의 문 앞에서" 언급한 그 사건이다.
그것이 내 의료 분쟁 역사의 끝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운명의 여신은 내 편이 아니었다.
2009년 2월 신생아가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어느 날 낮에 별문제 없이 출산한 아기였고 출산 후 몇 시간까지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저녁 무렵 직원으로부터 아기 상태가 이상하다고 연락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가서 아기를 보았더니 코에서 피가 살짝 나고 얼굴이 창백했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아기의 상태가 위중한 것은 틀림이 없었다. 보호자는 아기가 조금 이상한 것 같다고 몇 시간 전부터 병실 담당 직원에게 말했으나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서 인지 직원은 나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 직원이 그때 왜 그렇게 처신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아기는 세브란스로 전원 하였고 며칠이 지나서 아기는 사망했다. 하도 험악한 일을 수없이 겪다 보니 그때 얼마에 합의금을 지불하고 마무리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이후 나는 그렇지 않아도 심했던 습성 하나가 더 심해졌다. 직원이나 동업자나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고 모든 것을 직접 혼자 다 하려는 습성이다. 산부인과 분만 의사로 사는 한 의료 사고나 의료 분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그리고 경험이 많은 의사라 하더라도 예측하지 않은 채 발생하는 사고가 생긴다. 분만 산부인과를 운영하다 보면 의료 사고는 1년에 한건 정도 생긴다고 알려져 있다. 발생 건수는 분만 건수에 따라서도 다르기도 하고 운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그렇게 동업을 하면서 처음에는 분만도 했지만 의사회 활동도 바쁘고 의료 사고의 영향도 있어 분만을 접었다. 그때 한겨레 신문에 기고했던 "분만실을 폐쇄하며"라는 글은 지금도 간혹 찾아서 본다.
"진오비 산부인과 개원"
그 후 2년쯤 지나자 외래 진료만으로는 병원 운영이 어려워져서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2명이서 가져갈 수입이 거의 없어서 할 수 없이 다시 분만을 하기로 결정했다. 혼자 분만을 담당하기는 어렵고 여의사는 기존 대로 난임 진료를 주로 담당하고 진오비 활동을 같이 하던 남자 의사가 합류해서 당직도 하고 분만 진료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가 2012년 11월이었다. 병원 이름은 진오비 산부인과로 정했다. 기존 2, 3 층에 4 층을 한층 더 임대하여 소아청소년과를 개설하고 의사도 한분 채용했다. 나로서는 4번째 개원이다. 그러니까 아이온 산부인과를 폐원한 것이 3번째 폐원인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를테면 발전적 폐원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 동업은 몇 년간 지속되었다가 결국 7년인가 8년 전쯤 동업을 해지하고 지금은 혼자서 병원을 운영한다. 혼자서 산전 진료와 분만 진료를 다 하고 있는데 남자 의사 혼자서 365일 24 시간 분만을 돕고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의사로는 아마 내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산부인과 의료계에서는 혼자 운영하는 의사를 홀산이라고 하니 내가 분만하는 마지막 홀산일 것이다.
"첫째는 입지 조건"
다른 업종도 대체로 그렇지만 병원을 개원할 때 고민하는 첫째는 입지 조건이다. 왜냐하면 병원은 사람이 직접 방문해야 진단이든 치료든 행위가 이루어지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쉽고 오기 쉬운 곳이 좋다. 물론 주변에 같은 업종이 없는지, 배후 인구가 많은 지도 중요하다.
산부인과는 배후 인구가 5만 명 정도 있는 것이 적당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구 50만 명의 도시라면 산부인과가 10개쯤 있으면 된다는 뜻이다. 내과나 소아청소년과는 수요가 더 많기 때문에 배후 인구가 산부인과 보다 적어도 된다. 반면 안과나 성형외과는 수요가 많지 않은 과라서 배후 인구가 더 많아야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과거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여러 이유로 안과나 피부과, 성형외과 수요가 대폭 늘어나서 훨씬 적은 배후 인구로도 유지된다고 들었다. 반면 산부인과는 갈수록 출산율이 줄어서 배후 인구가 과거보다 서너 배 정도 많아야 그나마 현상 유지가 가능한 실정이다.
"둘째는 병원 규모"
입지 조건 외에 고려할 사항은 병원의 규모다. 건물을 짓던 임대를 하던 어느 정도 규모로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진료 과목에 따라 다르지만 산부인과나 정형외과는 크면 클수록 좋다. 외래 진료실 외에도 분만실이나 수술실, 방사선실, 초음파 실등 갖추어야 할 공간이 많다. 필요한 공간이 크기도 하지만 환자들이 진료를 받을 병원을 선택할 때 의사의 명성 못지않게 병원의 규모도 많은 영향을 준다. 문제는 그만한 자금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자금 능력이 부족할 때 동업을 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동업은 자금을 나누어 부담함으로써 얻는 득도 있지만 당직 근무를 나누어서 하는 등 장점이 많다. 대신 수입을 반으로 나누어야 하는 단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동업자 간에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단점이다. 그래서 동업에 대해서는 도시락 싸가면서 말리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4번의 동업을 했다.
처음에는 후배 남자 의사와 함께 2명이서 했고, 그다음에는 먼저의 남자 의사에 더하여 후배 여의사와 함께 3명이 했고, 세 번째는 의사회 활동을 함께 하던 여의사와 둘이서 동업했다. 네 번째는 기존의 여의사에 더해 남자 의사까지 총 3명이서 동업을 했다. 그리고 현재는 혼자 운영하고 있는데서 보다시피 나는 동업과는 맞지 않았다. 동업을 이어나가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잘못이 가장 크다. 나는 흔히 독불장군이라고 하는 말 그대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향에 고집도 세다. 다른 사람과 타협하고 조정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미숙하다. 무엇보다 인내심이 부족하다. 동업을 한 것도 내 탓이고 동업을 이어가지 못한 것도 내 탓이다.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다. 물론 내가 가진 그런 단점이 없었더라도 동업은 쉽지 않다.
나는 동업에는 반대하는 입장이고 , 결혼에는 찬성하는 입장이다. 이 둘은 여러 가지 점에서 상당히 비슷하다. 상호 배려하는 마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그 둘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동업은 신뢰가 바탕이라면 결혼은 사랑이 바탕이라는 점이 다르다. 신뢰는 오래 할 수 있지만 묶는 힘이 약하고 사랑은 짧게 끝날 수 있지만 묶는 힘이 세다.
또 하나 공통점.
동업이나 결혼이나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번 잠가 놓으면 가만히 놓아두어도 그대로 있는 자물쇠가 아니다. 끊임없이 발을 굴러야 쓰러지지 않고 가는 자전거와 같다. 알아서 스스로 가는 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