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lue poin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leblue May 22. 2020

안녕하세요 저는,

무소속의 설움. 요즘 자기소개가 싫은 이유

 몇 개의 자소서를 쓰다 보니 글 쓰는 행위 자체에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내비치고 증명해야 하는 글. 나는 그런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어려서부터 나를 드러내기보다는 숨기는 것이 편했다.


 내게 가장 어색한 순간은 자기소개를 주고받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다음에 내 이름을 말하자면 가끔 붕 뜨는 느낌이 든다. 내 이름과 나라는 존재가 연결되지 않는 기분이다. 내 이름, 그 세 글자에 담겨있는 나는 누구일까. 


 裕晶.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듯 내 이름에도 뜻이 담겨있다. 넉넉할 유와 맑을 정. 내 이름의 뜻은 썩 괜찮은 편이다. 내 입맛대로 해석해보자면 넉넉한 마음과 맑은 정신의 소유자랄까. 


 살면서 마주한 동명이인이 꽤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유정과 나의 유정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소리는 같지만 이것을 미세하게 구분하는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인가. 요즘에는 결국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나는 결국 모든 유정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간다.


 예전에는 특별한 하나의 유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을 거치고 대학 생활을 즐기면서 나만의 유정에 담긴 의미를 하나씩 모아갔다. 아이디어 넘치는, 대인관계가 원만한, 책임감 높은, 잔잔한 등의 수식어가 나랑 잘 어울리는 듯했다.


 또, 여러 집단의 유정으로 살아가면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알아갈 수 있었다. 교내 축구부 매니저 장을 맡으며, 내가 생각보다 보수적인 집단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봉사를 기획하는 대외활동 운영진으로 활동하면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끌어안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름 바쁜 대학 생활을 하면서, 너무 많은 일이 몰려오면 비겁하게 도망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족에서의 나는, 장녀인 탓에 어른스러운 척했지만 사실 항상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친해지긴 쉽지만 은근한 벽이 있어 가끔 차갑다고 했다. 연인과의 관계에서 나는, 자존심을 부리고 고집이 세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그렇게 차근차근 내 이름에 담긴 나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듯했다. 아주 조그마한 모래성이었지만 나름 소박했고 고왔다. 가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한 줌의 모래를 뿌려주기도 하고, 작지만 옹골진 나의 손바닥으로 모래성을 단단하게 두드리기도 했다. 


 가끔은 쨍한 해가 떠서 내 모래성을 찬란하게 비추기도 하고, 가끔은 부슬비가 와서 겉면을 부수기도 했지만 밑으로 흡수된 물은 뿌리를 단단하게 해 주었다. 주위에 분홍빛의 꽃이 피기도 했고 알 수 없는 검은 벌레들이 다가와 굴을 파기도 했다.


 지금은 그 모래성이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쿵 하고 마음이 내려앉을 때가 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느낌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라는 의문이 들 때마다 내 이름과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자기 객관화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정체성, 자아, 나만의 무기, 차별점, 독창성 등의 단어는 나랑 멀어진 지 오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사담당자들은 자기소개서에 이 단어들을 드러내야 합격률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멍하니 그 말을 듣다가 가끔 실소가 나온다.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지금, 오로지 나 혼자 나아가야 한다. 항상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지금 와서 보니 나는 소속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집단에 소속된 나만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점점 어느 한 곳에 소속되기 힘들게 변하고 있다. 이 세상에 나 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 얼마 안 됐다. 그래서 아직은 막막하고 두렵고 울컥한가 보다. 모두가 이 과정을 거쳐 가겠지. 나도 모든 유정들과 같이 이 과정을 거쳐 다시 나의 모래성을 마주할 날이 왔으면. 그때는 거기에 아무도 없어도 행복하겠지.





https://youtu.be/XgC1oVkTPCw


그런 날이 있어

갑자기 혼자인 것만 같은 날

어딜 가도 내 자리가 아닌 것만 같고

고갠 떨궈지는 날


그럴 때마다 내게

얼마나 내가 소중한지

말해주는 너의 그 한마디에

Everything's alright

초라한 Nobody에서 다시 Somebody

특별한 나로 변해


You make me feel special

세상이 아무리 날 주저앉혀도

아프고 아픈 말들이 날 찔러도

네가 있어 난 다시 웃어

That's what you do


Again I feel special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다가도

사라져도 모를 사람 같다가도

날 부르는 네 목소리에

I feel loved, I feel so special


- 트와이스, Feel Special 가사 中

매거진의 이전글 3월 24일, 그날의 기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