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두려워하다.
대학생 때, 열심히 공부한 덕에 전과나 편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심지어 교수님을 따라 외국 대학에 교환학생을 신청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돈을 핑계로, 누구나 가는 길을 가지 않겠다는 포부로 하지 않았다. 사실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어릴 때부터 만나는 사람들과 환경이 바뀌는 것이 무서웠던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변화를 겪는다. 인생에는 선택하지 않고 맞이해야만 하는 변화들이 있고, 제주 또한 그랬다.
“그래도 제주에 살아서 좋겠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일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제주에 살아서 뭐가 좋은지 느끼지 못하고, 제주에 살아서 불편한 점만 곱씹었다.
“너무 습해서 전자기기가 금방 고장 나.”
“벌레가 너무 많아서, 밤에 잠을 못 잤어.”
“물가가 얼마나 비싼지, 장 보는 게 무서워.”
“택배비가 붙어서 인터넷 쇼핑하는 게 힘들어.”
일부러 끄집어낸 것이 아니었다.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불편함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제주. 모든 길에서 지도 앱을 의지해야 하는 제주. 필요한 것을 사러 가게에 가거나 아파서 병원에 갈 때도 검색을 의지해야 하는 제주. 나에게 제주는 차갑고 낯설었다.
제주에는 비 오는 날이 많아 맑은 날이 귀하다 했다. 올해는 비가 반가운 손님이지만,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불청객이다. 바다색까지 우중충한 비 오는 날, 집에만 있기 아쉬운 여행객이 있어 함께 차를 탔다. 사진 찍기로 유명한 무지개 도로를 지나 도두봉에 오르기로 했다. 오르는 길에 비가 그쳤고, 체력이 바닥인 나보다 아이가 앞선다. 짧게 걷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 정상은 사방에 가로막힌 것 없이 확 트여있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다. 자연스럽게 깊은 호흡을 내쉬며 멍하니 비행기의 이착륙을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에 왔다 가는구나.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까?’ 언제까지 제주에 있을 예정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미정'이라는 말은 집 앞에서 제주의 아름다움을 누리면서도, 곁을 주지 않게 만든다.
제주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내가 '적응'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제주는 이주민이 적응하기 참 힘든 곳이에요. 돈이 많거나, 인맥이 좋거나 해야 적응하더라고. 그래도 성실하면 어떻게든 돼요. 나도 결혼해서 제주 왔는데 벌써 20년이 되었네." 20년간 성실하게 택시 운전을 하셨다는 아저씨에게 우연히 듣게 된 적응 비결이었다.
개인과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함께 어울림(adaptedness)"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 개인의 내적 요구와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환경을 바꾸는 것을 외부변형이라고 부르고, 외부 세계에 맞추어 자신을 내적 및 심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내부 변형이라고 부른다. [정신분석 용어사전: 적응]
나는 제주와 함께 어울리고 있을까? 비행기 이착륙을 보기 위해 벚꽃이 질 때, 그 후 비가 내릴 때 또 도두봉에 올랐다. 비행기에 탄 당신도 나처럼 변화를 맞아 제주에 왔고, 집에 돌아가거나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가겠지.
집에서 도두봉보다 더 가까운 곳에 사라봉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다녀왔다기에, 함께 갈 수 있는 오름이구나 싶었다. 유난히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던 날, 사라봉에 올랐다. 올라가는 계단에서는 ‘여길 유치원생들이 올라갔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아이가 날 앞서 올라가고, 시원한 바람이 가빠진 호흡을 토닥인다. 망양정에 올라 영주 10경 중의 하나인 풍경을 바라본다. 눈에 담기는 것보다 더 넓게 펼쳐진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선이 희미하고 초록색 나무들이 내가 있는 공간을 상기시켜준다. 예로부터 ‘사봉낙조’라 불리며 해지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하니 지나가다 또 들릴 이유가 생겼다.
제주는 어딜 가나 자연이 아름답다. 돌담과 길, 숲과 오름, 바다와 하늘이 아름다운 색으로 멋진 그림이 된다. 카메라로 다 담기지 않는 그림을 감상하고 있으면 이 그림과 함께 어울리기 위해 내부 변형을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든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제 제주가 좋다고 인정해.'
'회복하기에는 좋은 장소라는 말을 받아들여.'
'돈도 인맥도 없지만 제주에서 뭐든 성실히 해보고 싶다고 해.'
'제주는 이제 우리 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