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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팰럿Pallet Aug 19. 2018

매우 사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

대학교때 썼던 미학 수업 레포트

대학 시절 '미학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습니다. 벌써 10년도 넘은 이야기네요. 여러 교양 수업 중에서 특히나 엄청 빠져들었던 강의였는데, 말랑했던 그때의 감성과 뭔가 '정의'하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대학 초년생의 경직이 느껴지네요. 수업을 듣고 과제로 제출했던 레포트. 오랜만에 꺼내봤는데,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아 공유해 봅니다.


나에게 있어서의 美


나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사람다움'으로 시작된다.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 더 나아가 그 조화 속에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다.


만물은 각자 나름대로의 역할과 존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조화가 세상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인간은 사람다움으로 자연과 세상과 모두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끈질기게 쫓는 것은 아름다움이 세상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장 궁극의 방법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꾸준히 그것에 접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시대와 인식에 따라서 무의식적으로 발현되기도 하였고 의식적으로 고찰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은 조화에 대한 의식적인 산물이다. 역사시대 이전의 동굴벽화가 그랬고, 그 이후의 그림과 음악, 공연 등이 그랬다. 그리고 종교와 철학 등의 학문으로 발현되기도 하였는데, 이런 학문적인 영역은 조화에 대한 무의식적인 고찰을 문자를 통해 의식화하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몸과 영, 혼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몸(體)'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이며 시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영역이다. 즉, 사물을 다른 어떤 판단도 섞지 않고 사물 자체로 받아들이는 부분이다. 이는 식물적, 광물적, 동물적인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혼(魂)'은 사람의 기억과 생각 등 인지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영역이라 할 수 있겠다.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가 혼을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대화나 행동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모습과 표정, 행위의 패턴 등이 바로 이 영역에 속한다. '영(靈)'은 사람이 사물을 통해 참 가치를 깨달을 때, 그 깨달음을 주는 주체적인 영역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언행을 통해서 답습되는 부분이 아닌 진정한 자아의 영역이다. 이것은 순수하게 내 것이기도 하지만 순수하게 자연의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몸의 영역에서 혼의 영역으로, 혼의 영역에서 영의 영역으로 발전하는 삶을 원한다. 그러나 발전이 꼭 몸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가는 순차적인 발전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몸에서 혼으로 갔다가 다시 영으로 가기도 하고 영에서 혼으로 와서 몸에서 채득 된 뒤 영으로 가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영의 영역은 어떤 한정된 끝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시키고 그 욕심과 목표를 위한 노력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욕구의 산물이 건축물과 예술품, 철학과 종교, 각종 학문 등 여러 가지 문화의 요소이다. 이 요소들에서 인간이 아름다움에 대해서 어떻게 고찰하고 있는지 그 바탕이 드러난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이런 유형의 요소들은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위에서 이야기한 몸의 영역과도 같다. 그러나 그것은 몸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혼의 영역이 더해진다. - 그러나 유형의 사물 자체로는 몸의 영역에 머무른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대적인 시각과 작가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으며, 그 사물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그 작품을 보는 인간의 시선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 작가는 작품 속에 자신의 욕구와 목표에 대한 노력을 담는다. 이것이 작가가 취하는 혼의 영역의 모습이고 그 사물에는 그 혼이 덧씌워진다.


혼은 인간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 아름다움을 찾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인간은 혼에서 비롯된 사고를 통해서 그것을 몸으로 표출한다. 그리고 각기 다른 혼을 가진 인간들은 그들 서로가 만들어낸 혼의 산물을 통해서 몸과 영의 영역에 접근한다. 몸의 영역으로 접근하면서 시대의 문화와 예술적 가치를 따지고 진정으로 예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며 또 다른 양식의 예술품들을 만들어낸다. 또 혼의 영역으로 접근하면서 인간이 예술을 비롯한 사상, 문화, 사회 속에서 어떻게 변모해야 하며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자아실현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이런 유형의 산물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욕구와 목표를 위한 노력은 하나의 문화와 사회를 만들었고 무형의 요소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각적으로 아름답다고 하는 것과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요리사가 맛있는 요리를 정성을 들여서 만들면 그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며 그 요리를 아름답다고 한다. 어떤 가족의 화목한 모습을 보았을 때도 사람들은 그 가족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것은 예술작품과 같이 형태나 외형적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은 아니다. 단지 요리사나 가족 구성원이 자신의 자리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냄으로써 나타나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요리사는 최고의 요리사가 되겠다는 욕심이 있었고 그 욕구에 대한 자기 노력이 있었다. 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아름다움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모습으로 끝나지 않고 그 속에서 가치를 알고 깨닫게 된다. 그 가치 속에서 보이는 조화가 사랑이며, 그 일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답다는 말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영의 영역이다.


이렇게 영의 영역으로 오르게 되는 인간들은 자연과 사회와의 합일과 조화를 체득하며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아름다움은 몸의 영역으로만 끝나서도 안되고 혼의 영역으로만 끝나서도 안된다. 이 두 영역으로 끝나게 되면 그것은 인간 중심으로 한정되고 만다. 현대의 대부분의 인간은 혼의 영역 이하에서 안주함으로 세상과의 조화를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과거의 인간들은 이에 훨씬 범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몸과 혼의 영역을 영의 영역으로 아우를 수 있는 그들만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만의 아우라.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통해서 약점이 있는 각 영역을 보완해주었으며 그 완성을 또한 사랑으로 귀결시켰다. 정말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움이란 조화(調和)이다. 그리고 조화의 바탕과 궁극 점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영의 영역의 최고점이며 혼의 영역과 몸의 영역을 포괄할 수 있다. 예술품도 학문도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것도 인간이 자신, 그리고 다른 인간, 이로써 이루어지는 사회, 사회를 껴안는 세상과의 사랑에 맞닿아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들을 인간의 편의와 명예, 부(富)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보이는 그대로만을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누군가 사랑은 껴안는 행위 너머에 있다는 말을 했다. 보이는 자체를 껴안는 것이 사랑의 기쁨이 아니다. 바로 모든 요소의 조화를 느끼고 생각하고 깨달으며 그것에서 희열과 기쁨, 행복을 맛보는 것이 사랑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세상 모든 것과의 조화의 결정체인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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