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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Apr 26. 2023

뻥튀기

작고 작은 세상, 크고 단단한 행복

 강냉이나 튀밥은 내 어린 시절 인기 간식이었다. 뻥튀기 아저씨가 동네에 오시는 날은 동네 축제였다.

 당시 뻥튀기는 현장에서 만들었다. 재료는 손님들이 집에서 바가지에 담아 온 말린 옥수수나 쌀이었다. 그 곡식을 화로 같은 쇳통안에 넣고 나무장작불위에서 한참 돌린다. 이때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곡물이 익어 부풀어 오르기 직전이다. 이때 뻥튀기 아저씨는 아이들에게 물러서라고 손짓을 하셨다. 그리고는 "뻥이야!"하고 크게 외치셨다. 그 뒤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 순간 아이들은 작은 손을 양 귀에 꼭 틀어막고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지난 몇십 년간 옛날 간식들은 대부분 자리를 내주었지만, 뻥튀기는 살아남았다. 마트에서 팔고 길거리에서도 판다. 물론 폭발음은 사라졌다. 


 우리 동네에 가끔 오시는 뻥튀기 아저씨가 있다. 며칠 전 오랜만에 뻥튀기를 사러 갔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안 보이고 맞은편에 다른 아저씨가 계셨다.  


 다가가서 보니 이 뻥튀기는 뭔가 달라 보였다. 한 봉지 안에 여러 뻥튀기가 들어있는 것이다. 다른 곳은 강냉이는 강냉이, 튀밥은 튀밥, 떡튀밥은 떡튀밥, 보리 뻥튀기는 보리 뻥튀기별로 따로따로 많은 양씩 포장되어 있다. 


 뻥튀기에 혼종 포장이라니. 옥수수 강냉이냐, 튀밥이냐 하는 결정장애자들 때문인가. 재료에서도 달랐다. 돼지감자로 만든 뻥튀기가 처음 등장했다. 당뇨인들에게 반가운 일이다. 집에 와서 자세히 보니 그 집 뻥튀기는 다른 면으로도 특별했다. 칼로리며 영양성분들이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가장 탁월한 건 식감이었다. 내가 뻥튀기를 먹는 이유로 90% 이상이 식감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쉽게 무너지는 만만함이 좋다. 바스러질 때 '바사삭'하는 소리가 주는 쾌감도 그만이다. 이때 아무리 세상이 나를 해할지라도 내 멘털만은 기어이 살아남았음을 실감한다. 


 이때 특별히 바삭하다는 것은 재료가 신선해서일 것이다. 게다가 국산이라니, 생산지도 감동이다. 이렇듯 2~3,000원 하는 뻥튀기 한 봉지에 많은 감동이 담겨있다. 


 그 감동은 아주 작은 의지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켜온 당당한 간식, 뻥튀기. 그 독점적 권력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지금까지 다른 뻥튀기들은 포장이나 맛, 재료등이 천편일률적이었다. 그런데 그 아저씨, 아니 사장님은 하나하나 다 바꾸셨다. 재료, 신선도, 포장 등등. 한 개 판매하실 때마다 자부심으로 빛나던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손짓, 몸짓, 말투, 표정, 그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취하지 않는 고객응대였다. 각 뻥튀기의 재료와 맛에 대해 밀도 높은 설명도 곁들이신다. 


 이는 내게 행복을 주었다. '뻥튀기'라는 작은 세계 안의 '도전과 변화'다. 그 세계가 워낙 작다 보니 이런 도전이 신문에 날일도 없고, 이걸 팔아서 큰 부자가 될 리도 없을 터다. 


하지만 사장님이나 그걸 사가는 손님에게는 행복이 쌓인다. 그 행복이 지구를 돌고 돌아 어디로 되돌아갈지 모르는 일이다. 


'뻥튀기'라는 과자는 영양이나 맛이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그 간식만이 해내는 충실한 역할이 있다. 유리멘털자들이 자기를 위해 '대리 처형'될 대상을 찾을 때다. 그 역할을 해내는 게 고맙고 기특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난 직장과 가정에서 내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까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대충 다루진 않는지. 최악이 있다. '자아'를 뻥튀기처럼 부풀리는 거다. '나는 이런데 있을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하면서. 


 알차지고 싶다. 작고 가벼운 세계인, '뻥튀기'지만, 성실함과 실험정신으로 살아가는 우리 동네 뻥튀기 사장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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