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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르를 비틀다

봉준호와 김지운, 두 거장의 실험

by 김형범

영화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예술입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늘 장르에 대한 창의적 도전이 자리하곤 하죠. 관습적인 장르의 문법을 비틀고 뒤흔들면서 새로운 재미와 의미를 발굴해온 한국영화의 두 거장, 봉준호와 김지운 감독에 주목해보려 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장르 비틀기'로 점철된 걸작이라 할 만합니다. 이 영화는 겉보기에는 연쇄살인마를 쫓는 형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예요. 그러나 영화는 곧 장르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기 시작하죠. 화려한 액션 대신 지루하고 고된 수사 과정이 전면에 부각되고, 명쾌한 해결보다는 끝내 미제로 남는 사건의 미스터리함이 강조됩니다.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보다, 사건 이면의 사회적 부조리와 인간 본성의 어둠을 들춰내는 데 방점이 찍히는 거죠.

이런 장르 비틀기는 단순히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는 데 그치지 않아요. 오히려 우리가 범죄 영화를 통해 쉽게 소비해온 통쾌함과 선악의 도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현실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을 촉발하죠. 장르에 균열을 내는 과정 속에서 삶의 복잡성과 불가해함을 응시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봉준호 감독 특유의 방식이라 할 수 있겠어요.


김지운 감독의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2008)


반면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장르를 비트는 좀 더 유쾌하고 역동적인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스파게티 웨스턴을 차용하되, 이를 한국의 근현대사라는 기묘한 배경 속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하죠. 무법자, 건맨, 의로운 시민 등 클리셰적 캐릭터들은 골때리게 과장되고 왜곡되어 등장해요. 선과 악의 경계는 사라지고 인물들은 황당무계한 싸움을 벌이며 부조리극을 연출하죠.


김지운 감독의 장르 비틀기는 관객을 놀이의 한가운데로 초대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적 도식이 파괴되면서, 오히려 예측 불가능한 전개의 즐거움은 배가 되죠. 심오한 주제의식보다는, 장르물을 보는 순수한 재미 그 자체가 전면화되는 것이죠. 관객은 끊임없이 뒤집히는 장르적 기대 속에서 영화보기의 쾌감을 만끽하게 됩니다.



이처럼 봉준호와 김지운, 두 감독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장르를 비틀어 관객과 소통해요. 전자가 장르의 틀을 교란하면서 삶의 진실을 탐문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면, 후자는 장르적 관습을 희화화하면서 영화 그 자체의 오락성에 천착하는 편이죠. 하지만 두 경우 모두 관객에게 장르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기대 이상의 만족을 선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익숙한 장르영화를 볼 때에도 습관적 기대를 잠시 내려놓아 보세요. 고정된 장르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유영하는 감독들의 상상력에 주목해보면 어떨까요. 당신이 한 편의 영화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신선한 감흥과 만날지 모릅니다. 봉준호와 김지운이 보여준 것처럼, 장르에 대한 창의적 도전을 즐기는 자세. 바로 그것이 무한한 영화의 세계를 만끽하는 관객의 자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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