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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표와 기의의 경계에서 탄생한 번역의 예술

문화의 차이를 넘나드는 언어의 비밀

by 김형범

언어는 우리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그 도구가 모든 상황에서 쉽게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서 그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려 할 때, 번역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각 언어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표와 기의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기표는 단어의 외형적 표현, 즉 소리나 글자 형태를 말하고, 기의는 그 표현 안에 담긴 실제 의미를 뜻합니다. 번역의 어려움은 바로 이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벌어지는데, 같은 기표라도 문화나 언어에 따라 기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번역가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조정하고, 다른 언어 사용자에게도 그 의미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번역 과정에서 기표와 기의의 차이가 주는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는 프랑스어에서 나비와 나방이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한국어나 영어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각각 다른 단어로 구분하여 부릅니다. 하지만 프랑스어에서는 이 두 생물이 하나의 단어로 묶여 표현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단어의 차이가 아니라, 프랑스어에서 나비와 나방을 바라보는 방식이 한국어나 영어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생물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기표와 기의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나비와 나방이라는 두 가지 기의를 동일한 기표로 표현하는 프랑스어에서는 이 차이를 번역할 때 기의의 정확한 전달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한국어나 영어로 번역하려면 그 기의에 맞는 각각의 단어를 찾아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묘한 의미 차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례는 영화 '기생충'에서 등장하는 '짜파구리'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짜파구리'는 한국에서 매우 익숙한 음식 조합으로, 짜파게티와 너구리 라면을 섞어 만든 음식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단어를 영어권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짜파게티와 너구리라는 브랜드 이름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도 어렵고, 그 조합을 설명하는 것도 복잡합니다. 그래서 번역가는 '짜파구리'를 '람동'으로 번역했습니다. '람동'은 라면(Ramen)과 우동(Udon)의 합성어로, 영어권 관객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번역은 기표를 바꿨지만, 기의를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영어권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창의적인 시도입니다. 짜파구리라는 기표는 한국 관객에게는 익숙하지만, 그 기의를 다른 문화권으로 전달하려면 새롭게 구성된 기표인 '람동'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번역가는 이러한 기표와 기의의 차이를 넘어서야 합니다. 프랑스어에서 나비와 나방이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것처럼, 한 언어에서 동일하게 인식되는 개념이 다른 언어에서는 전혀 다르게 분리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짜파구리에서 보듯이 한국어에서 통용되는 기표가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번역의 질과 결과가 달라집니다. 단순히 기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기의를 이해하고, 이를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은 상당히 복잡하고 섬세한 작업입니다.


번역의 어려움은 단순히 언어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 언어가 가지는 독특한 문화적 맥락과 깊이 있는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정(情)'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번역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정'은 단순히 애정이나 감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깊은 유대와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단순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고, 문화적 배경을 이해해야만 그 진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번역가는 단어 하나에 담긴 의미 이상의 것들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적 지식뿐만 아니라 그 언어가 속한 문화적 맥락까지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프랑스어의 나비와 나방, 한국어의 짜파구리와 같은 사례는 번역의 복잡성과 동시에 그 창의성을 잘 보여줍니다. 번역가는 단순히 단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담고 있는 기표와 기의를 분석하고, 그것이 속한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후 새로운 기표를 창조하는 예술적인 작업을 합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는 다른 언어와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의미의 변환과 조정이 일어나는지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 번역은 단순히 말 그대로의 의미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 간의 경계를 넘는 과정입니다. 언어가 가진 기표와 기의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 차이를 조정하여 다른 문화 속에서도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은 번역가의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번역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지만, 그 세계가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우리에게 전달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이 있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번역은 단순한 언어 변환을 넘어서, 문화 간의 다리를 잇는 중요한 작업임을 이 두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번역의 과정과 언어적 차이를 바라볼 때, 그 이면에 숨겨진 기표와 기의의 복잡한 관계를 생각해 보세요. 번역가는 단순한 의미 전달자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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