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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범 Dec 20. 2024

영화 [서브스턴스]를 보고...

젊음의 대가, 파멸의 서막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약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한 번쯤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잠시 유혹을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이를 먹어갑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TV와 광고에서는 동안의 비법, 피부 재생 크림, 항노화 제품들을 쏟아냅니다. 현대 사회는 젊음을 신화처럼 떠받들며, 노화를 일종의 실패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을 날카롭게 파고든 영화가 2024년 화제를 모은 영화 서브스턴스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한때 인기를 끌었던 에어로빅 TV 프로그램의 스타였습니다. 하지만 50세가 된 이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에서 해고됩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싶던 그녀는 절망에 빠져 있던 중, 병원에서 알 수 없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바로 서브스턴스라는 이름의 신비한 약물입니다. 이 약물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단순히 주름을 펴고 피부를 매끄럽게 만드는 차원을 넘어, 자신의 몸에서 "젊고 완벽한 자기 자신"을 물리적으로 생성할 수 있는 기적 같은 능력을 발휘합니다. 영화에서는 엘리자베스의 젊은 버전인 수(마가렛 퀄리)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순간부터 영화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하지만 이 약물에는 치명적인 조건이 붙습니다. 바로 "일주일마다 원래의 몸과 젊은 몸이 교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교대 주기를 어기면, 원래의 몸은 급속도로 노화되기 시작합니다. 쉽게 말해, 몸과 정신이 하나의 자원을 공유하는 셈입니다. 이 독특한 설정은 단순한 공포감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의 젊은 모습과 끊임없이 대립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점차 절망에 빠져들고, 그 절망은 자괴감과 분노로 변해갑니다.     


여기서 영화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젊음을 되찾고 싶다는 엘리자베스의 욕망이 결국 그녀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신체적 변화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인 갈등이 고조되면서 영화는 점차 공포와 혐오의 서스펜스로 변합니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대립하면서, 그 갈등은 자기 자신과의 전쟁으로 치닫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수의 자만과 교만을 경고하지만, 수는 오히려 더 많은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며 교대 주기를 어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부터 파멸의 서막이 열립니다.     

규칙이 깨지는 순간, 대가는 즉각 찾아옵니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급속도로 노화되기 시작합니다. 손가락이 쪼그라들고, 피부는 늘어지고,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원래의 자신'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해집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단순한 바디 호러를 넘어, 현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젊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티토노스입니다. 티토노스는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사랑을 받았던 인간으로, 에오스의 간청으로 불사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에오스는 젊음의 축복을 함께 요구하지 않았고, 그 결과 티토노스는 죽지 않는 대신 끝없이 늙어가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몸은 쪼그라들고, 결국 그는 메뚜기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티토노스의 이야기와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는 매우 흡사합니다. 젊음과 불멸을 얻고자 했지만, 그 대가로 더 큰 고통과 비극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똑같은 교훈을 던집니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 메시지는 더욱 강렬해집니다. 젊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갈라내어 만든 존재였던 수는 이제 독립적인 인격으로 변하며 엘리자베스를 조종하고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그 관계는 단순한 공포를 넘어서, "내 안의 나와 싸우는 심리적 갈등"을 떠올리게 합니다. 결국, 엘리자베스와 수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자 두 사람의 존재가 하나로 합쳐지며, "몬스트로 엘리사수"라는 끔찍한 괴물이 탄생합니다. 이 괴물은 엘리자베스와 수의 인격이 하나로 뭉쳐진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줍니다. 두 인격이 서로의 자원과 신체를 빼앗고, 서로를 파괴한 끝에 탄생한 괴물은 현대 사회의 "미의 이상"이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잊을 수 없는 이미지로 남습니다. 몬스트로 엘리사수는 할리우드의 무대에 올라섭니다. 과거의 엘리자베스가 대중에게 사랑받던 모습처럼, 관객들은 그녀를 향해 박수를 보냅니다. 하지만 괴물의 가면이 벗겨지고, 몸에서 내장이 터져나오는 끔찍한 장면이 이어지면서, 관객들은 박수 대신 비명과 공포로 응답합니다. 이 장면은 한때 사랑받던 존재가 어떻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리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를 통해 느낀 점은 명확합니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그 자연스러움을 거부하며, 더 젊어지기 위해,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소모하게 만듭니다. 더 젊고 매력적인 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결국 내 본래의 모습이 얼마나 망가지는지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영화 속 몬스트로 엘리사수는 그 상징이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티토노스가 늙고 쪼그라들어 메뚜기가 되었듯, 영화 속 엘리자베스도 점점 쪼그라들고 망가져 갑니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티토노스는 원하지 않은 운명을 맞이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더 큰 비극을 만들어냅니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단순한 공포 영화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욕망을 조명하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불로장생의 신화를 꿈꾸며 젊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들의 파멸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더 나은 나"를 갈망하는 욕망의 상징일지도 모릅니다.

     

젊음과 아름다움의 끝은 어디일까요? 영화 서브스턴는 그 끝이 얼마나 참혹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끝에 다다르기 전에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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