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이야기, 다른 주제 어떻게 볼것인가?
[부고니아]를 보았다.
[지구를 지켜라]와 플롯과 구성은 거의 똑같은 영화였다. 하지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전혀 달랐다. 그래서 결말에 어느 부분이 왜 달랐을까?
[지구를 지켜라]는 2004년에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장준환 감독의 영화다.
지구인 병구는 월식이 일어나는 밤까지 안드로메다 왕자를 만나야 지구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외계인인 것으로 의심되는 강사장을 납치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강 사장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외계인이 아님을 어필한다. 그 과정에서 코미디적인 연출이 들어가고 관객은 강사장이 외계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유는 강 사장이 병구의 가족을 착취하는 부르주아로 묘사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복수의 대상이었던 강 사장을 병구가 납치와 괴롭힘을 하기 위한 망상의 결과물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강 사장은 외계인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병구가 만나고 싶었던 안드로메다 왕자였다. 왕자는 월식에 맞춰서 가까스로 우주선에 도착한다. 부하가 왕자에게 지구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 왕자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물론 외계어다)로 그냥 폭파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구라는 행성이 사라진다.
여기까지가 [지구를 지켜라]의 시놉시스다.
[부고니아]는 어떤가? 거의 같다. 다만 다른 점은 엠마스톤이 연기한 미셸의 캐릭터가 달라진 것 말고 없다. 강 사장은 막무가내로 자신이 외계인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한다. 하지만 미셸은 차분한 어조로 자신이 외계인이 아니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방어한다. 물론 테디([지구를 지켜라] 병구역)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심리 싸움이 계속되고 월식의 날은 계속 다가온다. 중간에 (과거 동네에서 테디를 괴롭혔던)경찰이 찾아와서 CEO 실종 사건을 묻는다. 그 사이 테디의 사촌 동생 도니는 미셸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다가 자살을 한다. 총성 때문에 테디는 경찰을 죽인다. 그리고 미셸을 죽이려고 한다. 이에 엄마를 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기 차에 부동액(을 가장한 치료 약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사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말을 믿은 테디는 엄마에게로 달려간다. 엄마는 제약회사 임상 실험을 하다가 혼수상태가 되었고 그 회사 사장이 바로 미셸이었다. 미셸은 테디가 사라진 사이 탈출하려다 이번 납치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하실 비밀방에는 해부했던 흔적이 있다. 미셸은 테디가 엄마의 죽음을 목격하고 돌아오자, 분노한 미셸은 테디에게 이 별에 자신이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결국 미셸은 테디에게 우주선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같이 가려 한다. 회사 자신의 방에 있는 옷장, 그리고 어디에나 볼 수 있는 전자계산기 비밀 코드로 갈 수 있다고 말한다. 테디가 먼저 옷장에 들어가지만, 자신이 가지고 온 수제 폭탄으로 죽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미셸의 거짓말일까?
아니다. 응급차에 실려 가던 미셸은 사건 현장이 된 자신의 방에 돌아오고 테디에게 이야기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우주선에 간다. 그리고 다른 외계인과 회의 끝에 세계 여러 곳에서 인류의 치명적인 약점을 없애는 실험이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셸(이자 안드로메다 여왕)은 슬픈 눈으로 지구에서 인류만 전멸시킨다.
같은 이야기지만 [지구를 지켜라]는 근대적인 대립을 풍자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이야기다. 외계인이라는 황당한 설정은 주제적으로는 지배층의 다른 이름이 되고 언제든지 피지배층을 없앨 수 있다는 다소 과격한 결말이 사람들의 씁쓸한 웃음을 만든다.
[부고니아]는 고대 그리스에서 소의 사체에서 꿀벌이 태어난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만들어진 신념이다. 한마디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어느 부분은 사실일지 몰라도 그것을 그럴싸하게 엮어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빈 부분을 지어내 만든다. 이야기란 것이 그런 것이다.
감독은 이야기가 얼마나 인간에게 위험한지를 말한다. 사실을 사실로 보지 않고 잘못된 정보로 엮어 만든 믿음이 얼마나 잘못인지를 말하고 있다. 사실 [부고니아]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모든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인류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이것에 쐐기를 박은 것이 테디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차피 인류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두 영화는 결국 인류의 '멸망'으로 끝나지만, 그 이유에 대한 진단은 완전히 다르다. [지구를 지켜라]의 결말은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을 끝없이 착취하는 사회 구조 때문에 생긴 비극이었다면 [부고니아]의 결말은 우리가 사실을 그대로 보지 않고, 확인되지 않은 '가짜 이야기'나 잘못된 믿음에 빠져 자신을 망가뜨린 결과다. 한 영화가 사회 시스템의 폭력을 지적한다면, 다른 영화는 인간 정신의 나약함을 겨냥하고 있다.
이 두 작품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를 파국으로 이끄는 것이 타인에 의한 '지배'일까, 아니면 자신을 속이는 '오해'와 '잘못된 신념'의 위험한 조합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부고니아]가 인류의 치명적인 약점을 '잘못 생각하고 믿는 것(인지적 오류)'이라고 진단했지만, 바로 이 약점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성찰로 바뀔 수가 있을 것이라는 감독의 자그만 소망을 영화 안에 녹아내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영화 안에서 인류는 멸망하지만 현실 인류는 발전과 퇴보를 거듭하면서 계속 수정 발전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