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월호 [월간 에세이] 투고작
퇴근길은 누구나 편안히 가고 싶다.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한 시간의 지하철 여행을 마치고 마을버스를 탈 때면 늘 선택을 하게 된다. 빠르게 집에 도착하려면 집에서 더 가까운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야 하지만, 그러면 15분쯤 서서 가야 한다. 반면에 마을버스 기점과 가까운 역에서 타면 집에 가는 시간은 조금 더 걸리지만 편하게 앉아서 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기점에서 마을버스를 탄다.
무더운 8월의 퇴근길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나도 그 줄에 합류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버스가 도착했고, 사람들은 차례로 한 명씩 승차했다. 기점이라 버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차 안을 둘러본 뒤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 자리는 뒷바퀴 위라 다리를 올려야 하는 불편한 자리였다. 백팩은 앞으로 매고,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유튜브 쇼츠를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빈자리가 거의 다 채워진 버스는 문을 닫고 출발했다.
한참을 갔다. 쇼츠를 몇십 개나 봤는지 모른다. 두 정거장쯤 지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탔다. 역 근처여서 그런지 유난히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꾸역꾸역 들어오는 사람들의 열기에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이 차 안으로 옮겨졌다. 내 앞자리 옆에는 한 부부가 서 있었다. 아내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고, 남편은 안절부절 못하며 자리를 살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탔다. 그제야 분홍색 동그란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임산부 배지였다. 배도 제법 불러 보였다. 대략 일곱, 여덟 달쯤 되어 보였다. 남편이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좁고 덥고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아내가 서 있는 상황이 얼마나 힘겨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버스는 다시 출발했지만, 다음 정거장도 역 근처라 사람들이 더 탈 것이다. 많은 이들이 차 안이 가득 차 마을버스가 만석이 되면 버스기사가 곧이어 버스가 도착한다며 승객을 제한까지 하는 정류장이었다. 잠시 양보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내가 앉은 자리는 버스 뒷바퀴 위라 다리를 올려야 하는 불편한 자리다. 임산부가 앉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앉아 있는 승객들은 모두 창밖만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대부분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이었으니 쉽게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민에 빠졌다. 다음 정류장에 이르면 분명 이 부부는 더 힘이 들 것이다. 망설이다가 결국 앞에 앉아 있는 분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상대는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만 이 자리는 불편하니, 어르신께서 내 자리에 앉으시고 임산부는 앞자리에 앉으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내가 일어서자마자 앞자리에 있던 분이 뒷자리로 이동했고, 임산부가 그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서 있느라 힘들었던지 그녀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짧게 숨을 고르더니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저 손사래를 치며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버스가 집 근처에 다다랐다. 내려야 할 정류장이다. 정류장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나도, 그리고 그 부부도 함께 버스를 내렸다. 내가 먼저 내려서 발걸음을 옮기자, 부부는 장바구니를 추스르며 뒤따랐다. 그 짧은 순간 눈길이 마주쳤다. 서로 가벼운 웃음을 나누었다.
힘들었던 하루가 어느새 잊혔다. 뭔가 뿌듯한 일을 해낸 듯한 기분은 아파트 현관을 지나 집에 들어서면서까지 이어졌다. 집 안에서는 아내가 아이와 함께 영어 단어 문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랑하듯 그날의 일을 이야기했고, 아내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영웅 같다”라는 말을 건넸다.
영웅. 거창한 단어였다. 하지만 곱씹어 보니, 꼭 대단한 힘이나 특별한 능력을 가져야만 되는 건 아닌 듯했다. 버스 안의 잠깐의 선택, 그 작은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안도의 숨결이 되고, 내게는 오래 기억될 장면이 되었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순간을 몇 번은 맞이할 것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삶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오늘, 아주 작은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 안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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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은 제 생일입니다.
지난 2년간 브런치에 매일 글을 올렸고, 소소하게 몇 군데에서 연락이 와 제 글을 책에 싣는 귀한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20대에는 방향 없이 대학 시절을 보냈고, 30대에는 영화감독이라는 야망에 불타올랐습니다. 40대에는 예상치 못한 병 때문에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부터 만 50세가 되었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지나, 또 다른 터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앞으로 어떤 세상을 꿈꾸게 될까요?
저는 여전히 숨 쉬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있을 것입니다.
철없이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썼던 20대에도 그랬고, 장편영화를 만든다고 무모하게 덤볐던 30대에도 그랬으며, 병과 삶 앞에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던 40대에도 그러했습니다.
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이고, 50이라는 숫자는 그저 다음 장을 여는 페이지 번호에 불과하니까요.
저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세요.
그리고 이 시간 속을 함께 걷고 있는 저와 당신의 모든 삶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