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바람은 비밀을 참지 않는다

칼미크(Kalmyk) 공화국의 설화

by 김형범

1. 죽음의 가위질

칼미크의 끝없는 대초원 위로 붉은 해가 지면, 사람들은 거대한 검은 성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그곳엔 ‘뿔 달린 칸’이 살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엔 지옥에서 돋아난 듯한 두 개의 뿔이 자라나 있었고, 그 비밀을 본 이발사들은 모두 성벽 너머 차가운 심연으로 사라졌다.

소년 ‘아르슬란’에게 그 운명이 찾아온 것은 보름달이 뜨던 밤이었다. 늙은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아침에 갓 구운 보리 빵 두 덩이를 아들의 품에 넣어주었다. “아들아, 공포는 짐승과 같아서 네가 등을 보이면 덮친단다. 진실한 마음만이 짐승을 잠재울 수 있어.”


2. 금단의 왕관

성안은 무거울 정도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칸은 거대한 털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아르슬란이 가위를 들자, 칸이 나직이 읊조렸다. “내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자, 다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리라.”

아르슬란이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벗겼을 때, 소년은 숨을 멈췄다. 칸의 머리 위엔 기괴하게 뒤틀린 산양의 뿔이 솟아 있었다. 칸의 눈동자는 증오와 수치심으로 번뜩였다. 그 순간, 아르슬란은 도망치는 대신 품속에서 온기가 남은 보리 빵을 꺼내 칸의 손에 쥐여주었다.

“칸이시여, 이 빵은 저희 어머니의 기도입니다. 뿔은 하늘의 뜻이나, 이 빵은 땅의 사랑입니다.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빵의 고소한 향기가 차가운 살육의 공기를 덮었다. 칸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온기에 눈을 감았다. 그는 소년을 죽이는 대신, 무거운 금화를 던져주며 궁 밖으로 쫓아냈다.


3. 땅이 삼키지 못한 말

소년은 살아 돌아왔으나, 비밀은 독처럼 몸속을 파고들었다. 칸의 뿔을 생각할 때마다 목구멍이 근질거리고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말하지 못한 진실은 병이 되어 소년을 야위게 했다.

결국 소년은 인적 없는 초원 끝으로 달려가 땅에 깊은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그 구멍에 얼굴을 묻고 사력을 다해 소리쳤다. “칸은 뿔이 달렸다! 우리 칸은 괴물 뿔을 가졌다!”

속을 다 비워낸 소년은 비로소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4. 갈대의 노래

계절이 바뀌고, 소년이 비밀을 쏟아부었던 구덩이 위로 꼿꼿한 갈대들이 자라났다. 지나가던 양치기 소년이 그 갈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양치기가 피리를 입에 대자, 선율 대신 소년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다. “칸은 뿔이 달렸다네... 수치심에 눈이 먼 뿔 달린 칸이라네...”

피리 소리는 초원을 건너고 성벽을 넘어 칸의 침소까지 흘러들었다. 분노한 칸은 아르슬란을 즉시 잡아들였다.


5. 왕관을 벗다

사형대 앞에 선 소년은 담담하게 자신의 악기를 꺼냈다. 그리고 피리 소리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그것은 비난이 아니라, 무거운 비밀을 지고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고독에 대한 위로였다.

“강한 사자는 발톱을 숨기지 않고, 넓은 하늘은 구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칸이시여, 당신의 뿔은 괴물의 표식이 아니라 대지가 당신에게 내린 무게입니다.”

악기 소리는 성안의 모든 병사와 백성들의 마음을 울렸다. 칸은 가만히 손을 올려 자신의 뿔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평생 그를 괴롭히던 저주였지만, 동시에 그가 온 힘을 다해 숨겨온 ‘인간성’이기도 했다.

칸은 스스로 모자를 벗어 던졌다. 드러난 뿔 위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비밀이 사라진 자리엔 더 이상 공포가 머물 수 없었다. 칸은 소년을 처형하는 대신 자신의 곁에 두어 진실을 말하는 악사가 되게 했다.

그날 이후, 칼미크의 바람은 더 이상 비밀을 나르지 않았다. 대신 그 바람은 정직한 사람들의 노랫소리만을 실어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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