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1편

조나단 스위프트의 지독한 풍자 소설이 아이들의 모험담으로 둔갑하기까지

by 김형범

어린 시절 머리맡에서 들었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펼쳐 보았던 『걸리버 여행기』를 떠올려 봅니다. 너무나 친숙한 이 모험담이 사실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아니라, 당대 사회의 치부를 드러낸 날카로운 고발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거대한 거인이 수많은 소인에게 밧줄로 묶여 있는 삽화는 워낙 유명해서 마치 당연히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쓰인 모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긴 18세기의 성인 독자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추악한 민낯을 마주하며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가 1726년 이 작품을 처음 세상에 내놓았을 때, 그의 목적은 즐거운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을 낱낱이 파헤쳐 사람들을 몹시 화나게 만드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간 당시 이 책은 영국 사회를 뒤흔든 일종의 문제작이었습니다. 스위프트는 당대의 부패한 정치가와 무능한 지식인들, 그리고 종교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던 명분 없는 전쟁들을 조롱하기 위해 판타지라는 형식을 빌려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지독하고도 차가운 풍자 소설이 시간이 흐르며 아이들의 전유물처럼 변해버린 과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 같은 반전을 담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창조해낸 소인국과 거인국이라는 설정이 가진 압도적인 시각적 매력이었습니다. 신체가 극단적으로 작아지거나 커지는 상황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소재였고, 출판업자들은 이러한 상업적 가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출판 시장은 대중의 입맛에 맞게 원작을 가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작에 가득했던 정치적 비난과 종교적 논쟁, 그리고 인간의 생리적 현상을 이용한 노골적이고 지저분한 묘사들은 아이들이 읽기에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삭제되었습니다. 특히 걸리버가 겪는 네 번의 여행 중 인간 혐오의 극치를 보여주는 후반부의 이야기들은 통째로 들어내고,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전반부의 모험만을 추려낸 삭제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품었던 독설과 냉소는 거세되었고, 그 빈자리는 용기 있는 모험가의 성장 서사가 대신 채우게 되었습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이런 편집 과정이 반복되면서, 어느덧 기억 속에서 원작의 서슬 퍼런 칼날은 잊히고 알록달록한 무지개색 포장지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동화 『걸리버 여행기』는 진실의 불편함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슬픈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작가가 던진 뼈아픈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그 질문을 동화라는 안전한 틀 안에 가두어 무해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당대 권력자들을 향해 휘둘렀던 풍자의 몽둥이가 아이들의 장난감 칼로 변해버린 셈입니다. 이제는 이 오래된 이야기에서 덧칠해진 동심의 화장을 지워내고, 이야기꾼 조나단 스위프트가 300년 전 진정으로 전하고자 했던 차갑고도 뜨거운 목소리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몸집의 크고 작음을 논하는 모험이 아니라, 마음속에 도사린 편협함이라는 괴물을 마주하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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