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끝으로 건네는 시도, 몽테뉴가 틔운 나라는 우주

365일 중에 하루, 2월 28일

by 김형범

우리는 흔히 글을 쓴다고 하면 무언가 완성된 결론이나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거창한 교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에세이’라는 장르의 뿌리를 찾아가 보면, 그 시작은 위대한 진리의 선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고백에서 출발했음을 알게 됩니다. 1533년 오늘 태어난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드 몽테뉴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글쓰기 방식을 선보이며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몽테뉴가 활동하던 16세기는 종교 전쟁으로 세상이 광기와 혼란에 빠진 시기였습니다. 법관으로서 탄탄한 경력을 쌓던 그는 마흔 무렵 돌연 모든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고 고향 성채의 탑실 서재로 은둔했습니다. 밖에서는 서로의 신념이 옳다며 피 흘리는 싸움이 계속되었지만, 몽테뉴는 그 광풍 속에서 외부의 정답을 좇는 대신 책으로 둘러싸인 고요한 서재에 앉아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깊이 탐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서재에서 떠오르는 단상을 기록하며 글에 ‘에세(Essais)’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는 당시 프랑스어로 ‘시도’나 ‘시험’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전의 글쓰기가 주로 성경의 가르침이나 고대 성현들의 절대적인 진리를 전파하는 수단이었다면, 몽테뉴는 자신의 글이 결코 완결된 진리가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신의 기록이 단지 한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히는 과정, 즉 ‘시도’의 흔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장르 이름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의 중심에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짧고 강렬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몽테뉴는 이 문장을 서재 들보에 새겨두고 끊임없이 자신의 지적 오만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나약하고 주관적인지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향한 관용이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고정된 편견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고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몽테뉴 에세이의 특별함은 소재의 평범함에 있습니다. 그는 거창한 형이상학적 담론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식습관이나 잠버릇, 신체적 통증, 심지어 기르던 고양이와 눈을 맞추며 노는 사소한 순간까지도 철학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가장 잘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접근은 철학이 구름 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발밑의 흙과 같은 삶의 영역임을 일깨웠습니다.


문단과 문단 사이를 흐르는 그의 사유는 결국 ‘어떻게 온전한 자신이 될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모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며, 남의 시선이나 사회적 체면이 아닌 오직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강조했습니다. 몽테뉴에게 에세이 쓰기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가 아니라, 끊임없이 출렁이는 자아의 물결을 포착하고 기록하여 스스로를 치유하고 바로 세우는 수행과도 같았습니다.


몽테뉴가 창시한 에세이의 정신은 오늘날 기록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 5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글쓰기란 대단한 정답을 내놓는 숙제가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나를 정직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용기 있는 시도 그 자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남기는 소박한 기록들이 모여 하나의 우주를 이루듯, 몽테뉴의 철학은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며 오늘도 묵묵히 글을 이어갈 힘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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