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무용함과 잠식하는 악의 연대기
영화 <시너스: 죄인들>을 보고 나오며 머릿속에는 '야심'과 '진심'이라는 두 단어가 묵직하게 맴돌았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전작 <블랙 팬서>에서 증명했던 흑인 서사의 가능성을 이번 작품에서 단순한 프랜차이즈의 성공을 넘어선 미학적 경지로 격상시켰다. 이 영화는 1932년 미시시피 클락스데일을 배경으로, 블루스라는 음악적 뿌리와 뱀파이어라는 장르적 장치를 결합해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예술, 인종, 그리고 뱀파이어라는 키워드를 통해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시대의 명암을 짚어보고자 한다.
최근 할리우드의 스타 티모시 샬라메는 발레나 오페라처럼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예술은 하고 싶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극장의 쇠퇴와 OTT, AI의 공세 속에서 대중 예술의 위기를 논하다가 잘못된 예를 든 것이라 하지만, 예술의 본질을 '수치'로 재단하려 했던 그의 시각은 분명 미숙했다. 예술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이가 열광하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영혼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진실된 노래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그리오(Griot)'나 '화방자'의 전통은 대중성이 아닌 영혼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시너스>는 이러한 예술의 본질을 기교적인 연출로 증명한다. 주인공 새미가 기타를 들고 블루스를 노래하기 시작하면 공간의 물리적 제약은 무너진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1932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 복장의 인물들이 등장해 춤사위를 벌인다. 이는 단순한 시대착오적 연출이 아니라, 블루스라는 뿌리가 훗날 메탈, 록, 힙합으로 뻗어 나갈 미래의 영혼들을 현재로 소환하는 주술적 의식에 가깝다. 고대의 북소리와 날카로운 일렉 기타 사운드가 뒤섞이는 이 장면은 과거와 현대, 그리고 미래가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압축되는 경이로운 순간을 선사한다.
이 장면의 백미는 문화적 경계를 허무는 혼종성에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보 차우 부부의 시퀀스에서는 중화풍 무희와 경극의 손오공이 나타나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는 칼 더글라스의 'Kung Fu Fighting'으로 상징되는 블랙 오리엔탈리즘의 계보를 잇는 동시에, 예술이 단순히 특정 인종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공간과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적 영혼의 매개체임을 시각적으로 선포하는 것과 같다. 감독은 이 난해할 수도 있는 이미지를 통해 예술이 가진 초월적인 힘을 관객의 망막에 직접 새겨넣으며, 음악이 어떻게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허무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예술의 무용함을 말하곤 한다. 당장의 끼니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예술은 어찌 보면 철저히 쓸모없는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쓸모없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짐승과 구분 짓고, 인간으로 서 있게 만드는 유일하고도 고귀한 방법이다. 시대에 따라 왕좌를 차지하는 매체는 오페라에서 영화로 변하겠지만 그 안의 진심은 변치 않는다. 오스카 시상식 맨 앞줄에 앉아 붉은 발레복 여인의 턴을 지켜보던 티모시 샬라메가 이 영화를 통해 예술의 '고귀한 무용함'을 깨닫고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빌게 된다.
문화 콘텐츠의 성공 여부는 종종 해당 인종이나 공동체가 가진 결집력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실사판 <인어공주>가 나름의 성과를 거둔 반면 <백설공주>가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국 내에서 강력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흑인 세력의 지지 유무였다. 이는 단순히 머릿수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투영할 수 있는 대상에 열광하고 지지하는 집단적 자긍심의 발현이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블랙 팬서>를 통해 이러한 결집의 에너지를 확인했고, 이번 <시너스>에서 그 에너지를 예술적 완성도로 폭발시켰다.
이 영화는 상업적 프랜차이즈의 틀 안에서 정체성을 소모하는 대신, 흑인 문화의 뿌리인 블루스 그 자체에 대한 미학적 헌사를 택했다. 영화는 짐 크로우 법과 같은 인종차별의 역사를 배경으로 깔아두면서도, 단순히 흑인을 피해자로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누렸던 찰나의 자유와 주점에서의 흥겨운 연대를 공들여 묘사함으로써, 억압 속에서도 피어난 문화적 자존감을 보여준다. 델타 슬림이 감옥에서의 참혹한 경험을 블루스 가락으로 승화시키는 장면은 흑인 음악이 고통의 산물인 동시에 그 고통을 견디게 한 유일한 무기였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인과 전 세계 한인들에게 헌사하는 영화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역시 같은 맥락의 성취를 지향한다. 가장 개인적이고 특수한 배경을 가진 이야기가 가장 세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예술의 격언처럼, <시너스>는 흑인 서사라는 특수성을 통해 인간 보편의 고통과 자부심을 노래한다. 감독은 델타 블루스가 북진하여 시카고 블루스로 정착하는 역사를 스모크스택 형제의 대사에 녹여내며, 한 인종의 문화적 이동과 성장을 우아하게 그려낸다.
<시너스>가 보여주는 인종적 서사는 폐쇄적인 배타성이 아니라, 자기 뿌리에 대한 당당한 고백이다. 감독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를 명확히 아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단단한 자의식을 영화 전반에 투영했다. 1992년 시카고에서 노년의 새미가 펄린의 이름을 딴 클럽을 운영하며 여전히 블루스를 연주하는 모습은,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문화적 유산의 영속성을 상징한다. 이 영화는 흑인이라는 인종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창작자에게 건네는 강렬한 영감이다.
장르적으로 이 영화는 뱀파이어라는 고전적 괴물을 빌려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 뱀파이어들은 개별적인 영혼이 없는 존재들이다. 영혼이 없기에 죽음과 동시에 완전히 소멸하여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며, 이는 죽음 이후에도 노래와 기억으로 남는 인간의 모습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레믹으로 대표되는 뱀파이어들은 아일랜드 민요를 부르고 주기도문을 함께 암송하며 자신들을 '불멸의 구원자'로 포장하지만, 그 실체는 타인의 영혼과 문화를 탈취하여 연명하는 기생적 존재일 뿐이다.
가장 섬뜩한 지점은 뱀파이어들이 인간을 교란하는 방식에 있다. 그들은 개별적인 영혼은 없지만, 뱀파이어들 사이의 '공동 기억'을 공유하며 이를 이용해 산 자들을 기만한다. 인간이 가진 소중한 추억이나 관계를 비틀어 파고드는 그들의 속삭임은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60년이 흐른 뒤에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새미 앞에 나타난 스택과 메리는, 악이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개체별로 끈질기게 살아남아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시사하며 장르적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한다.
영화 속 괴물들이 집요하게 노리는 것은 주인공 새미의 음악, 즉 '블루스'다. 블루스는 현대 대중음악의 근간이자 고통받던 이들의 영혼이 담긴 '진짜' 공동의 기억이다. 뱀파이어가 음악을 뺏으려 한다는 설정은, 영혼 없는 주류 문화의 악이 소수자의 독립적인 문화와 역사적 기억을 말살하고 자신들의 가짜 기억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문화적 정복의 은유다. 결론적으로 블루스는 지켜냈지만, 영화는 악이 사람들을 하나둘씩 물들여가는 냉혹한 전염의 과정을 확실하게 포착하며 '쉬운 구원'을 거부한다.
결국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우리를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괴물 같은 것들의 총체다. 그것은 가난일 수도, 차별일 수도, 혹은 영혼을 갉아먹는 허무주의일 수도 있다. 로버트 존슨이 악마와 거래해 재능을 얻었다는 전설과 달리, 새미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 때문에 악마들을 불러내게 된다는 설정은 예술가가 짊어져야 할 숙명적 고독을 보여준다. 비록 구원은 멀어 보일지라도, 60년 뒤 다시 찾아온 어둠 앞에서도 기타를 튜닝하며 자신의 블루스를 연주하려는 새미의 뒷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묵직하게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