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스크린을 사랑했던 두 거장의 슬픈 절교

영화가 맺어주고 신념이 찢어놓은 고다르와 트뤼포

by 김형범

영화사에는 낭만적이면서도 잔인한 우정의 대명사로 불리는 두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물결,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입니다. 1950년대 파리, 어두운 시네마테크 객석에 나란히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던 두 청년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영화를 정규 교육으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그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했던 그들은 기존의 낡은 영화 문법을 비판하며 비평가로 활동을 시작했고, 결국에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트뤼포가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후 자신의 시나리오를 고다르에게 넘겨주어 그 유명한 영화 <네 멋대로 해라>가 탄생할 수 있었을 만큼, 그들은 서로의 재능을 아끼고 후원하는 완벽한 파트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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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좌)와 프랑수와 트뤼포(우)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이들의 우정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균열은 1968년, 프랑스를 뒤흔든 ‘68 혁명’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당시 칸 영화제 중단을 주도하며 사회 변혁 운동에 뛰어들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지향점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고다르는 영화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부수고 세상을 바꾸는 혁명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급진적인 정치 투쟁에 몰두했습니다. 반면 트뤼포는 영화란 현실의 고통을 위로하고 인간의 삶을 서정적으로 그려내는 예술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다르에게 트뤼포는 현실을 외면하는 타협주의자처럼 보였고, 트뤼포에게 고다르는 예술을 정치 선전 도구로 전락시킨 과격분자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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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태로운 긴장 관계가 파국을 맞이한 것은 1973년, 트뤼포의 영화 <아메리카의 밤>이 개봉하면서였습니다. 영화 촬영 현장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영화 만들기의 즐거움과 고통을 낭만적으로 그려낸, 말 그대로 ‘영화에 대한 사랑 고백’과도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대중과 평단은 환호했지만, 단 한 사람, 고다르는 분노했습니다. 그는 트뤼포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고다르는 영화 제작 현장의 모순과 자본의 문제를 감추고 현실을 아름답게만 포장한 트뤼포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그렇게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편지 말미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을 돈이 부족하니 네가 번 돈으로 제작비를 지원해달라는 요구를 덧붙였다는 점입니다.


평소 온화한 성격이었던 트뤼포였지만, 이 편지를 받고는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무려 20장에 달하는 답장을 써 내려갔습니다. 트뤼포는 고다르가 겉으로는 혁명가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부유한 배경 속에서 사람들을 조종하고 이용하려 든다며, 그의 위선적인 태도를 낱낱이 비판했습니다. "너는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천재 예술가인 척 굴지만, 실제로는 주변 사람들을 경멸할 뿐"이라는 독설과 함께, 트뤼포는 고다르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절교를 선언했습니다. 영화라는 공통분모로 묶여 있었던 두 천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때문에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등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두 사람은 트뤼포가 1984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고다르는 트뤼포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트뤼포가 사망한 뒤 발간된 서신집의 서문을 의뢰받았을 때, 고다르는 복잡한 심경을 담은 글을 남깁니다. "우리를 묶어준 것은 오직 스크린뿐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 글에서, 고다르는 "영화는 우리에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었지만, 삶은 결국 우리에게 복수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서로를 할퀴고 비난했지만, 결국 그 밑바닥에는 영화에 대한 지독한 사랑과,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옛 친구에 대한 애증이 깔려 있었음을 뒤늦게 고백한 셈입니다.


그들은 같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같은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방식이 너무나 달랐기에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혁명을 꿈꾸던 고다르와 낭만을 지키려던 트뤼포. 두 거장은 영화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서로를 밀어내며 파멸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치열했던 불화조차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드라마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진정으로 싸웠던 대상은 서로가 아니라, 영화를 너무나 사랑했던 자기 자신의 뜨거운 열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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