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왕과 사는 남자] 리뷰

모든 단점을 잊게 만든 기획의 힘든 단점을 잊게 만든 기획의 힘

by 김형범

설날 연휴 일요일에 가족과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관에는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요즘 영화관에 관객이 없다는데 이 영화는 예외인가 봅니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마주한 이 영화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비극,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도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수양대군, 그리고 영월로 유배되어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 서슬 퍼런 시대에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충신 엄흥도의 이야기도 교과서 한귀퉁이를 장식하고 있지요. 우리는 보통 이 이야기를 '권력의 비정함'과 '변치 않는 충절'이라는 숭고한 도덕 교과서처럼 기억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익숙한 역사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비틀어 놓았습니다. 영화 속 엄흥도는 우리가 알던 고고한 충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쇠락해가는 마을을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지극히 현실적인 촌장으로 등장합니다. 유배지 선정이라는 국가적 사건을 마을 부흥의 호재로 삼으려는 그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 지역 개발을 위해 애쓰는 소시민들의 욕망과 묘하게 겹쳐 보였습니다. 왕의 비극조차 생존의 기회로 바라보는 이 발칙한 상상력은 박제된 역사 속 인물을 단숨에 우리 옆집에 사는 평범한 가장의 모습으로 불러내었습니다.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닫는 것은 엄흥도의 아들이 관아에서 곤장을 맞으면서부터입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절대적인 권력자 앞에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 아비의 비굴함, 그리고 그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소년 왕의 절망. 이 장면에서 영화는 단순한 사극을 넘어섭니다. 단종은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비로소 진짜 왕이 되기를 결심하고, 엄흥도는 비겁한 생존을 선택으로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가 관객의 마음 속에 큰 불이 떨어지고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이루어지는 시점인 것이죠. 마치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이 글을 배우며 세상을 보는 눈을 뜨듯, 각자의 욕망과 결핍을 채우기 위해 변화해가는 인물들의 서사는 보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영화 전문가의 시선에서 이 작품의 만듦새는 그리 훌륭하지 않았습니다. 거친 편집점은 종종 몰입을 방해했고, 화면 속을 뛰어다니는 호랑이 CG는 물에 젖은 고양이처럼 작고 축 늘어진것처럼 보였고 너무 어색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기술적인 완성도만 따지자면 낙제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영화관에 나온 관객들은 그 호랑이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술의 빈틈을 메운 것은 다름 아닌 탄탄한 '기획'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기술적 화려함에 매몰되어 정작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를 놓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투박한 그릇에 담더라도 음식의 맛이 훌륭하면 손님은 만족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500년 전의 역사적 인물에게 현대인의 생존 본능과 가족애라는 욕망을 투영한 기획의 힘은, 어설픈 CG와 거친 만듦새를 기꺼이 눈감아주게 만들었습니다. 관객은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공감'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콘텐츠란 눈을 속이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훔치는 기획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비록 겉모습은 조금 허술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관객의 욕망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면 그 진심은 반드시 통하게 마련입니다. 가짜 호랑이가 진짜 욕망을 삼켜버린 이 영화처럼, 중요한 것은 화려한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에서 펄떡이는 이야기의 심장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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