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 위에서 발견하는 나의 버팀목
료타의 등번호는 7번. 형의 등번호다.
촉망 받던 농구선수 미야기 소타. 형은 친구들과 낚시를 하러 떠난 어느 날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료타가 농구하는 걸 반기지 않았다. 사라진 큰아들이 생각나니까. 료타는 형처럼 농구를 잘 하고 싶었다. 소타가 없는 현실에서 농구만이 삶의 낙이고 위로다.
전국대회. 수년간 무패를 기록한 산노공고와의 시합. 형이 꿈꾸던 바로 그 경기.
료타는 국내 최고 가드라 불리는 선수와 매치업한다. 역대 최강 팀이라 평가받는 산노의 선수들은 개인 기량도 뛰어난 데다 팀플레이 패턴도 다양하고 합도 잘 맞는다. 경기장에 있는 대부분의 관객이 산노의 패배를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반면 료타는 신장도 십센치 이상 열세. 점프슛이 약하다는 단점도 간파 당한다. 전반 탐색이 끝나자마자 산노는 올 코트 프레스로 승부를 걸어온다. 공 운반을 담당하는 포인트 가드 료타는 하프라인도 넘어가지 못한 채 발이 묶인다. 후반 8분 동안 득점 0점. 작전 타임을 부른 감독은 료타에게 혼자서 산노의 올 코트 프레스를 뚫어낼 것을 주문한다.
*올 코트 프레스 : 상대팀이 하프라인을 넘기 전부터 강하게 압박 수비하는 전술
장면 하나.
출전하기 전에 차는 손목 아대
료타에게는 심호흡 장치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형 소타가 차던 빨간색 손목 보호대.
료타는 무섭고 두려울 때마다 감싸쥘 수 있다. 손목에 감긴 보호대를. 그리고 떠올릴 수 있다. 단번에. 형이랑 연습하던 코트. 처음 소타의 수비를 뚫고 슛을 성공했을 때 들었던 칭찬, “잘했어“, ”멋있었어”, 바닷가에서 불어와 나무를 흔들던 바람, 밀물과 썰물을 만들던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소금기 섞인 바다 냄새,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며 안아주던 형의 목소리와 심장 박동. 형이 잡지를 들여다보며 꿈꾸던 산노와의 경기, 마지막 점프, 더블 클러치에 이은 슛,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회전한 공, 골대로 빨려들어간 후 그물을 미끄러져 내려온 붉은 공, 골인, 승리.
형을 생각하며 달렸던 해변과 발바닥에 닿고 되튀던 모래. 백코트, 프런트코트, 다시 백코트, 드리블, 드리블, 드리블. 그리고 형이 알려준 문장. 겁이 날 땐 "이를 악물고 태연한 척을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심장이 쿵쾅거려도. 이를 악물고 괜찮은 척을 한다.
장면 둘.
긴장될 땐 손바닥을 보자는 약속
다른 하나는 손바닥의 글자. 크게 숨을 들이키고 내쉰 뒤 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보면, 아주 큰 소리로 외치듯 매직으로 굵고 진하게 적힌, ‘넘버 원 가드’가 있다.
캄캄한 밤, 숲속 산책로, 잔잔한 풀벌레 소리. 빠르게 흘러가던 구름, 듬성듬성 보이던 별빛, 바람이 지나며 일렁이던 물웅덩이. 그곳에 함께 있던 사람. 매번 겁먹고 도망치기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돌격대장이라 불러주는 사람. 국내 최고 가드와 맞붙는다는 생각에 쪼그라드는데 “너도 상당히 괜찮은 가드야”라고 말해주는 사람. 긴장될 때 해소할 방법을 정해두자 권하고, 손바닥을 보자고 말해주는 사람. 그 사람이 한치의 의심도 없이 건네준 신뢰와 기대를 떠올릴 수 있다.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영화에서 료타가 자유투를 위해 공을 받을 때, 심호흡을 하고 손바닥을 내려다보면 풀벌레 소리가 난다. 나는 이 연출이 너무 좋다. 그 조용한 코트의 공기를 풀벌레 소리가 가득 메운다)
료타는 손목을 감싸쥐고, 손바닥을 펼쳐볼 때마다, 각인된 인정과 신뢰를 소환할 수 있다. 산노의 올 코트 프레스를 돌파할 뿐 아니라, 경기 종료 1분 남은 시점, 5점 차로 지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동료들이 믿게 할 수 있다.
(쇼호쿠vs산노 경기는 라스트 1분이 제일 재미있다. 주전 5인의 장점이 최고조의 집중력으로 한 번씩 발휘된다. 이 고도의 집중을 트리거한 건 료타의 불러세움과 토닥임이라고 나는 느꼈다. 특히 마지막 24초, 모든 음성이 뮤트된 채 움직이는 만화처럼 작동하는 결말부는, 이미 내용을 다 아는데도 자꾸 보고 싶어진다)
슬램덩크 전권을 통틀어 딱 한 번 나오는, 사쿠라기와 루카와의 콤비 플레이. 둘이 서로에게 절대 하지 않던 패스를 해낸 순간, 기적처럼 쇼호쿠는 산노를 이긴다.
자기도 모르게 해버린 하이파이브에 놀라 멀뚱히 선 사쿠라기와 루카와를 끌어안고, 료타는 위를 올려다 본다. 하늘을 향한 료타의 눈을 카메라의 렌즈가 마주본다. 소타는 분명 보고 있었을 것이다.
분명, "잘했어", "멋있었어" 하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영화 속 인물은
코트에서 경기를 치르는 선수지만
코트가 세상이고 경기가 인생이라면
사실 '알아차림'이 제일 어려운 플레이 같다. 아대를 감싸쥐는 것도, 손바닥을 펼쳐 바라보는 것도, '내가 지금 겁에 질렸구나', '내가 지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구나'를 인지해야, 할 수 있는 (대응)행동이다.
평소에 체력을 기르고 테크닉을 익혔다고 해도 눈앞에 닥친 벽에 기세가 눌리면, 자신감을 잃고 시야가 좁아진다. 실패가 반복되어 누적되면, 나의 상태를 아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한다. 패배감에 사로잡힌 채 회피하거나, 이번 판은 끝났다고 여기는 포기가 더 쉽고 편하니까.
이런 경우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위축되느라 에너지도 금세 닳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코트 안에서 스스로 멘탈 관리가 가능한 료타는 이미 훌륭한 선수인 동시에 훌륭한 사람 같다.
나에겐 몇 번의 쿼터가 남았을까.
나는 전반전 후반전을 다 뛸 수 있을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플레이를 다 해봤는가.
내가 지금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나의 상태는 무엇인가.
나에게 심호흡 장치는 무엇인가.
슬램덩크는 만화책으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열 번 넘게 봤지만, 해가 바뀌고 1월이 될 때마다 이 영화를 주섬주섬 꺼내어 다시 본다. 두 시간 러닝 타임이 지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쯤이면 밖이 밝든 어둡든 나가서 뜀박질을 하고 싶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땀을 내고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면 현실의 내가 어느 구덩이에 움츠려 있든 다시금 동력원에 불을 지펴볼 마음이 들 것이다.
경기하는 도중에도 시시각각 성장하는 하나미치의 셀프 칭찬 능력과 아무리 무섭고 두려워도 손바닥을 펼쳐 평온을 되찾을 료타의 멋짐이 리마인드 해줄 것이다.
'한 번 사는 인생 기왕이면 내 눈에 멋지게 보이는 건 다 배운다!의 자세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보는 게 나을 것이다!'라는 다짐을.
여담이지만 하나미치가 화자인 슬램덩크 원작을 보는 동안에도 나는 언제나 료타가 멋지다고 생각해왔는데 영화를 보니 그 이유가 더 선명해진 것 같다.
가장 기복이 적고 가장 안정적이다. 모든 경기에서 자신보다 키가 크고 기량이 높은 상대를 마크하면서도 풀타임으로 출전한다. 아카기, 미츠이, 루카와, 사쿠라기, 주전 선수 4인이 돌아가며 한 번씩 부상을 당하거나 체력이 달리거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딪쳐 헤매다가 페이스를 되찾는 동안, 꾸준히 덤덤하게 구심점처럼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해낸다. 그 무던함과 성실함을 동경했다.
어릴 땐 몰랐는데 직장 다니고 사회 생활하면서 알았다. 부침 없고 꾸준하다는 건 엄청난 강점이다. 믿을 만한 포인트 가드. 게임 흐름을 파악하는 시야. 동료의 장단점 이해와 현재 상태 체크. 패스 센스. 하나미치를 초보자라 여기면서도 그의 장점을 이끌어내는 능력. 상대팀이 바뀌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퍼포먼스를 유지한다는 건 늘 노력한다는 뜻, 늘 성장하고 있다는 뜻.
료타가 어떻게 그런 인물일 수 있었는지 이노우에 감독이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통해 알려준 것 같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
각본 이노우에 다케히코
원작 이노우에 다케히코 만화 <슬램덩크>
개봉 2023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