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베는 기계, 인간을 베는 사회
실직한 제지업 기술자 만수는 일 년째 취업에 실패하고 있다. 일을 사랑했고 그 공로와 노력을 인정받아 명예로운 상도 받았지만 과거가 되었다. 면접은 번번이 만수를 내친다. 그림 같은 집, 자녀에게 아낌없이 줄 수 있던 지원, 화목한 가정을 일궈왔다는 자부심, 누리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위기에 놓인 만수는 취업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본인이 가고 싶은 자리에 있는 작업반장, 선출 그리고 그 자리에 들어갈지도 모를 본인보다 스펙 좋은 경쟁자 범모와 시조를 모두 죽이기로 한다.
장면 하나.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으니 '어쩔수가없다'
물류센터에서 짐을 나르던 만수는 긴급하게 면접 자리가 생겼다는 전화를 받고 당장 출발하고자 한다. 작업반장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수모를 당하는 만수는 작업복을 내놓으라는 손짓에 순순히 유니폼을 벗어 건넨다. 이 장면은 드높이 쌓인 박스 더미와 중장비가 움직이는 물류센터 한 귀퉁이에서 속옷 차림이 된 인간을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찍혀 있다. 영화 중반에 이르면 카메라는 속옷 차림에서 더 나아가 아예 알몸이 된 인간을 보여준다.
범모와 시조의 헐벗은 몸이 그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생명체 그 자체의 모습을 카메라는 담고 있다. 내게 '의복을 입지 못한 몸'은 평생 하던 일에서 쫓겨난 '실직' 상태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을 살해함으로써 만수는 ‘실직한 자신’을 죽여 없앤 것일까.
중산층 생활을 누리던 만수가 쥐고 있던 걸 놓고 싶지 않아 행한 선택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이 영화는 그럴 의도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듯하다. 다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물류센터의 플랫폼 노동, 신발을 판매하는 서비스업, 고된 노동이라 치부되는 일들은 대개 무례와 모욕을 견디는 일이라는 점이다.
나의 경우 스무 살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여러 회사와 여러 일을 경험했다. IT기업 개발자, 방송국 작가, 매거진 에디터, 시민단체 활동가, 카페 바리스타, 레스토랑 홀 스텝, 초중고 학생 과외, 유통기업 회계 보조 등등. 덕분에 직무에 따라 대우가 다르다는 걸 극명하게 배울 수 있었다.
급여가 적고 대인 서비스 스킬이 요구되는 곳일수록 사람을 부속품, 대체 가능한 소모품처럼 대하거나 인간 이하의 계급이 있다는 듯 내려다보려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건 나는 언제고 사람인데 말이다.
때문에 탈의실도 아닌 공장 한복판에서 작업복을 빼앗긴 만수가 장갑과 장화를 벗어던지며 내딛던 걸음에서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느꼈을 심정이 선연하게 상상되었다. 그 장면이 그냥 흘러가질 않았다.
극 중 범모의 아내, 아라는 말했다. '실직이 문제가 아니라 실직을 대하는 너의 태도가 문제'라고. 실직에 대처하는 선택으로 살인을 행한 만수는 논쟁할 필요 없이 벌 받아 마땅하지만, 실직한 상태의 사람,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 대인 관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수치심이 당연시되고 게다가 만연하기까지 한 사회 분위기는 문제적이다.
장면 둘.
우리가 지금 딛고 선 곳
'어쩔수가없다'는 믿음으로 만수가 지켜낸 집. '화목한 가정'으로 비춰지는 그림 같은 저택 아래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세 번의 살인. 아들의 절도. 부모의 묵인. 아들에게 강요한 거짓 증언. 가장의 범죄 은폐를 목격한 아내와 아들. 그리고 살처분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생명에게 행해진 도살. 이것들은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간성 상실. 비윤리적이지만 입시에 더 무게를 둔 가정교육. 가족 간의 신뢰 파괴. 정직과 양심의 죽음. 그리고 생명 경시.
영화 마지막 장면에는 나무를 베고 자르는 중장비가 나온다. 나는 이 숏이 괴수 영화에서 괴수를 촬영하듯 찍혀있다고 느꼈다. 기계를 운전하는 사람은 프레임에 나오지 않고 마치 기계 스스로 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찍혀 있었다.
효율의 논리로 나무를 베고 동물을 파묻고 사람을 해고하는 자본주의. 성장률이라는 깃발 아래 발전을 찬미하는 산업 구조. 그것을 내버려 둔 인류의 방조가 살아있는 나무를 베고, 죽이고, 토막 내고, 가공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을 베고 죽이고 토막 내고 가공하고 있다는 은유처럼 느껴졌다. 하여 이 장면도 잊기 어려웠다.
나무고 동물이고 생명을 그렇게 대하는 인간 사회가,
인간 개개인을 그렇게 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수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끝내 재취업에 성공한다. 허나 그 자리가 만수의 자리를 얼마나 보장할까. 인공지능이 도입된 공장을 시험운영하는 감독관은 금세 쓸모를 잃고 소거될 것이다. 과연 타인이 경쟁해야 할 존재였던가. 그 모든 살인은 헛수고가 될 것이 자명하다.
만수의 '어쩔수가없다'는 다짐은 과연 가족 안에서 수용될 수 있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버린 아내, 미리와 아들, 시원이 만수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가 무얼 딛고 서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이. 함께 살 수 있을까.
출근하는 만수를 배웅하는 미리와 시원의 얼굴, 끝끝내 만수에게만은 연주를 들려주지 않는 막내딸, 리원을 보건대, 만수가 치른 이 어마무시한 헛수고는 가족이 마주할 긴 투쟁의 서막처럼 보인다.
며칠 사이에 본 영화 <얼굴>의 땅 아래에도 양심과 혐오, 뒤틀린 자존심 그리고 어리석은 다짐이 묻혀 있었다. 두 영화 모두 묻고 있었다. 우리가 딛고 선 땅 아래, 무엇이 숨죽이고 있는지.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묻고 있진 않은지.
이렇게 자꾸 물어대는 영화들이 나는 반갑다. 땅속에 억눌린 분노를 묻든, 죄를 묻든,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어떻게든 돌아온다. 바다에 버린 플라스틱처럼. 오염수처럼.
영화 <어쩔수가없다>
감독 박찬욱
각본 박찬욱 이경미 이자혜 돈 맥켈러
원작 도널드 E.웨스트레이크 소설 <액스(The Ax)>
개봉 2025년 9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