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창문 사이로

억눌린 감정의 지문 찾기

by 윌마


Inside, Outside, 2008, 출처 : 갤러리현대

논어 팔일(八佾)편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구절이 나와요. 그림은 흰 바탕을 먼저 갖춰야 채색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적 품성의 중요성을 그림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죠. 그림에서 바탕을 뜻하는 흰 ‘소(素)’는 회화의 평면성과 같은 맥락입니다. 미술평론가 그린버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바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상 재현에 몰두했던 회화 풍토를 비판했습니다. 바탕이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기에 그림의 본질은 평면성에 있다는 것이지요. 바탕색은 순도 높은 본질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형상이 사라진 빈 공간은 마냥 공허한 것일까요? 형상을 버림으로써 그동안 보이지 않던 그 무엇을 드러냅니다.


소통의 관점에서 보면 그림의 바탕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만큼 마음에 준비가 되었는지를 의미합니다. 마치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하기 바로 전, 무대와 객석이 모두 숨을 죽이고 보이지 않는 음악을 기다리는 공간과 같은 것이죠. 음악의 현장성과 달리 그림의 바탕에는 무심히 흘려보낸 과거를 현재로 되돌려서 대면하는 시선이 담겼습니다. 그것은 경청하고 공감할 만큼 삶에 충분히 너그러워졌을 때 가능합니다. 대상을 그리듯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것은 경청과 공감을 통해 상대방과 교감한 뒤에 하는 거지요.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물론 주위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귀에 손을 대고 열심히 듣는 척하는데, 실제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론 결코 들어서는 안 될 악마의 유혹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처음에는 훤히 보이는 창문이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안과 밖은 따로 구분이 없었죠. 그들은 하나였고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는 일이 안과 밖에서 색을 입히는 일입니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움을 알게 된 이브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벌거벗은 몸을 가린 것처럼요. 맘에 드는 색은 즐겁게 입히고, 맘에 들지 않은 색은 힘겹게 입힙니다. 색이 바랠 때면 다시 입히고, 색에 지칠 때면 다른 색으로 입힙니다. 그렇게 색을 입히면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요? 안에서 밖이 보일까요? 볼 수 없다면 창문은 벽과 다르지 않습니다. 창문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내 안의 욕구를 전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요. 세상은 욕구가 바닥난 사람에게 다가와 원하는 게 무엇이냐는 짓궂은 질문을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간절히 외칠 때는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으면서, 머리는 굳고 새로운 무엇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는 시점이 되어서야 사라져 버린 자신의 욕구에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각을 밖으로 내어 놓고 주위로부터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름의 방향성을 찾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의 생각은 자주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죠. 특히 골방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 영역을 반영하지 못하기에 오류에 노출되기도 하고 개인의 상황에 따라 과장될 개연성이 있습니다. 오류가 있는 생각은 왜곡된 감정을 만듭니다. 왜곡된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면 우리는 힘든 감정을 다스릴 다른 생각과 행동을 끌어냅니다. 심리학 용어로는 방어기제라고 하지요. 회피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해요. 억압도 한 방편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죠. 주위에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을 해도 생각하지 않을 권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딱 일분만 눈을 감고 생각 없이 버텨보세요. 다른 일에 매달려보고 머리를 흔들어보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잊으려 해도 좌표 없이 떠오르는 생각의 물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과정은 창문에 색을 입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안으로 자신의 감정은 점점 희미해지는 거죠.


심리학 책을 보면 감정은 적고 생각은 많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억울하고 답답해도 그 마음을 감정으로 연결 짓지 못합니다. 부서져서 파편화된 조각 위에 자신을 세워 놓고서 타자를 대하듯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죠. 문제의 핵심은 본연의 감정에는 관심을 거두고, 생각에는 생각을 더하면서 오는 불균형에 있습니다. 생각은 많고 감정은 적은 패턴은 생산적이고 효과적으로 삶에 기여할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본인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생각과 감정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디까지가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감정인지 혼란스러워지죠. 사람들은 생각에서 비롯된 산출물을 자신의 감정으로 착각합니다. 앞서 얘기한 안쓰러운 마음도 사실은 자신의 본연의 감정이 아니에요. 자신을 대상화해서 바라보면서 나온 왜곡된 생각인 거죠. 심리학 책에 사례로 나오는 그 사람처럼 아픔을 향한 정규 코스를 따라가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규 코스의 끝 지점에서 만나요. 바닥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지하 몇 층까지 떨어진 후에 바로 그 지점에서 싸우기 시작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두텁게 색이 입혀진 창문으로 내 안의 나와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허리춤을 붙잡고 끝 모를 씨름을 하는 겁니다. 싸움판이 벌어졌는데 주위가 온전하겠어요? 풍비박산 나죠. 신기하게 빛은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옵니다. 깨진 창문 사이로 다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예요.


깨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들여다보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 안에서 행해지는 의식 활동과 이로 인한 부산물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그로 인해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얼마나 심했는지, 자신이 맺은 삶의 끈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살피지 못하는 거죠. 보이는 것에 매달려 살다가 아픔 방정식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할 때면 스스로가 민망스럽잖아요. 사실은 민망해 할 게 아니라, 감격의 눈물을 흘려야 할 순간입니다. 그 눈물은 나를 부수는 왜곡된 생각의 파편 위가 아니라, 무언가를 발견한 기쁨과 왜곡된 감정에 휘둘려 지낸 억울함이라는 단단한 감정의 바탕 위에 서 있다는 증거지요. 흐르는 눈물에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요? 그 하늘은 유난히 높고 파랗습니다. 유독 깊어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바람 한 점 얻지 못한 하늘이 아니라, 깊숙이 보이지 않는 무엇을 담고 있는 바탕입니다.


비장할 만큼 깊고 파란 하늘을 보면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의 하늘이 아니라 현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하늘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안과 밖이 하나 된 나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늘만큼 커다란 바탕 위에 자신을 세워 보세요. 바탕이 묻는 소리가 들리세요? 바탕은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는 겁니다. 바탕은 깨진 창문과 다르지 않아요. 깨진 창문 사이로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시간인 거죠. 바탕 위에 점을 하나 찍습니다. 까만 바탕 위에 까만 점을, 하얀 바탕 위에 하얀 점을 찍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점을 보이게 찍어 나갑니다. 점을 찍는 일은 바탕 위에 새로운 대상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너무도 많은 나를 올리는 것입니다. 화가 김기린은 '점은 시작일 수도 끝일 수도, 또한 선도 되고 형태도 되고, 그 안에는 시간도 생각도 흔적도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림에 가까이 가서 보면 마치 점들이 제작기 숨을 쉽니다. 닮은 듯 다른 모습의 점들은 시간과 생각과 흔적을 담은 삶의 지문입니다. 억눌려서 보이지 않았던 감정의 지문입니다.


작가는 1970년대 한국 화단의 큰 흐름이었던 단색조의 모노크롬 회화를 이끌었습니다. 제목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프랑스 유학 시절 영향을 받았던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의 책 이름과 같지요. 작가가 바탕 위에 점을 찍는 장면이 궁금하네요. '몸의 감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얻는 것이 진리의 실재'라는 메를로 퐁티의 주장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로 역류시켜 다시 보이게 하는 행위를 몸에 체화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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