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그 열다섯 번째 이야기
포르투에서의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스텔에서 커피와 토스트로 이루어진 유러피안 조식을 처묵처묵 한 후, 길을 나섰다. 첫 날과는 달리 동행이 없는 외로운 여행이지만, 이제 제법 시내 지리도 익숙해졌고 머릿 속에 가볼 장소들이 대충 입력이 된 상태라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오늘 여행의 시작은 해리포터의 배경이 되었던 렐루 서점, 전날 씨티투어에서는 건물 외관을 한 번 쓰윽 둘러본 정도였는데, 사실 별 다른 감흥은 없었다. 아마, 해리포터 이야기가 없었다면 신경도 안 쓰고 지나쳐 버리지 않았을까?
포르투 시내는 그야말로 코딱지만하다. 한 10~20분 정도 거리에 웬만한 볼거리는 다 몰려 있다. 렐루 서점 역시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서둘러 걸으면 5분 만에도 도착할 만한 거리다.) 구글 맵을 따라 터덜터덜 걷던 중, 트램을 발견했다. 유럽을 여행하는 도중에 만나는 트램은 언제 봐도 신기하고 반가운 존재다.
여기가 바로 해리포터의 배경이 되었던 렐루 서점이다. 이름만 봐서는 비데의 모티브였을 것 같지만... ㅡ.ㅡ;; 건물 모습이 왠지 모르게 고급스러운 제과점 느낌을 풍기는 것도 같다. 가이브 북에는 항상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하던데, 뭐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줄을 설 필요도 없었고, 그냥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서점이 대단해 봐야 뭐 얼... 엄뫄야 이게 뭐야?' 렐루 서점 안으로 들어서던 당시 속으로 읊조리던 대사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 휘황찬란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기대치가 낮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처음 그 느낌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 베르사유 궁전에 비견할 만한 화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그냥 뭐, '흔한 유럽 서점의 위엄.jpg'
사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케이블 TV에서 채널을 돌리다 잠깐씩 본 게 전부였을 뿐, 제대로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영화에 등장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해리포터' 하면 떠오르는 그 이미지 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 정돈데 해리포터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좋아서 까무러쳤을 듯,
똑같은 책이 여러 권씩 꽂혀 있는 일반적인 서점과는 달리, 렐루 서점의 책장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점이라기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귀족의 서재 같은 느낌도 들었다. 특히, 화려한 표지를 가진 여러 권의 책들이 모여 알록달록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2층에서 내려다 본 렐루 서점의 모습. 렐루 서점의 유명세에 비하면 제법 한산한 모습이다.
흔히, 렐루 서점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막상 와서 보니 누구나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다들, 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셔터를 눌러대기 바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사진촬영 금지에 대한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와전된 걸까?
그래도 손님들 중 일부, 정말 책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저 옆에서 책을 뒤적여봤지만, 역시 나는 책이랑 잘 맞지 않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한 1~2분 정도 책을 훑어보는 척 하다가, 옆에 있는 아저씨한테 사진이나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책 읽는 모습을 찍을까도 생각해봤지만, 연출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저 멀리 구름다리(?)로 뛰어가 포즈를 취했다. 구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찍어준 아저씨도 저 자리에서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한 장 찍고 난 후에 하이파이브를 하고 헤어졌다.
사진을 찍고 내려가는 아저씨의 뒷, 아니 옆모습을 찍어봤다. 아저씨라고 해야 할지, 할아버지라 해야 할지 조금은 애매한 중년의 신사였는데, 렐루 서점에 무척이나 어울리는 비주얼을 가지고 있으셨다. 영화배우라 해도 수긍이 갈만한 기럭지와 입이 떡 벌어지는 패션센스까지... 나도 나중에 저렇게 나이를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해봤지만, '아마 안될꺼야, 이번 생에는...'
쓸데없는 생각에 이은 자괴감을 잔뜩 안고 렐루 서점을 뛰쳐 나왔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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