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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노 Jan 14. 2022

나는 헤어짐을 잘못 배웠다.







기억의 첫 장면은 안방으로 뛰어 들어오는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의 표정이 어땠는지, 어떤 옷을 입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방으로 뛰어 들어와 3단짜리 낮은 서랍장을 열고 옷가지를 가방에 쑤셔 담았다. 아빠는 안방 문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11살이었지만 지금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엄마가 집을 나가려는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아이였던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미숙했던 것뿐이다. 부모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려 한다는 것은 알았다. 어린 내가 이해하는 것은 그 정도다.

 사실 아이에게 이 이상의 것을 알아주길 바라고 이해해 주길 요구해선 안된다. 아이에겐 아이가 감당할 만큼의 것을 주어야 한다. 나머지는 어른의 몫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자식 앞에서 가방을 싸던 엄마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싶다. 어떤 것이 그렇게 견디기 힘들었고 또 북박쳐오르기까지 감내하게 만들었으며, 그것들을 수용하기까지 얼만큼의 주저함과 사그라진 결심들이 있었을지 조금이나마 상상해 본다. 어른이 되어 상상해 본다. 이해해 보려 한다.

 엄마가 떠난 집에는 아빠와 나만 덩그러니 있다. 어른들 누구도 나에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잠깐의 헤어짐인지, 영원한 헤어짐인지 알 수조차 없다. 나는 헤어짐을 잘못 배웠다.



 아이의 마음은 어른들 마음대로 재단된다. 아직 잘 모를 거라고, 이해를 못 할 것이라고 편한 대로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아이는 표현하지 못해도 모든 걸 안다. 애석하게도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어린시절 벌어진 상처에 아무렇게나 쌓여버린 딱지들 위로 자란 어른이 되었다.

이제 어린 날의 상처를 돌보려 딱지를 조금씩 떼어보니 역시나 그 안은 아직도 여물지 않았다. 치료는 그때, 상처받았을 때 제대로 받아야 했었던 것이다. 깊게 곪은 상처는 괜찮은 듯 보여도 결국엔 아픔을 드러내고 만다.



 어른이 되어 그럴듯해 보여도 우리 마음엔, 속으로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남아있기도 하다. 지금 이대로 내버려 두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지내길 소원해도, 나는 우리가 아픔을 두려워 하지않고 그 속을 제대로 치료해내길 바란다. 딱지가 아닌 새 살이 돋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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