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사빛 Nov 29. 2020

향기는 그 사람을 기억하게 한다

우리 집에 천리향 꽃이 피었다.


우리 집에는 내가 아주 아끼는 화분이 하나 있다. 타노스의 손을 가진 내가, 그래도 애지중지 5년째 기르는 화분이다.
천리향이라는 건데, 이 꽃의 향이 무려 천 리까지 갈 만큼 진하고 향기로워 붙여진 이름이란다. 사실 나는 향에 예민하다. 좋은 향, 나쁜 향 이런 것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사람을 보면 어떤 향이 떠오르기도 하고, 향으로 사람을 기억하는 편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그런 게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의 목소리를 듣거나 모습을 보면 이 사람한테는 이런 향이 날 것 같다는 생각.
난 사람의 얼굴만 보고 금방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걸 요즘은 안면인식 장애라고들 하던데, 여하튼 나는 심각한 그것을 가지고 있어서 본 것을 기억하는 건 잘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나는 향으로는 기억한다. 그 향을 맡았을 때의 사람, 장소, 상황 등.
많고 많은 서점 중에 교보문고만 가는 것도 다 향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교보문고에서 나는 그 시그니처 향을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 그 디퓨져를 사서 해놨다. 책이랑 그 향이랑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책이 그 향인지 그 향이 책인지를 도통 모르겠다. 거기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책이 좋은 건지 그 향이 좋은 건지 헷갈릴 정도로.

여하튼 그 꽃은, 향이 너무 좋고 오래간다. 난 그 꽃이 피는 봄엔 날씨가 쌀쌀해도 일부러 창문을 열어둔다. 바람이 불면 그 향이 온 집을 타고 퍼지는데, 그때의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단점은 꽃이 피는 기간이 그렇게 길진 않다는 것. 금손인 사람들은 겨울에도 꽃을 피우고, 1년에 몇 번씩도 꽃을 피우던데 난 그건 되지 않았다. 도도하게 꼭 봄에만 잠깐 피었다 지곤 했다. 근데 그 꽃이 너무 좋은 게, 그 짧은 찰나에 나는 향이 아주 오래 기억된다는 것이다. 꽃이 져도 그 향 때문에 다음 봄이 또 기다려지고, 겨울에도 푸른 잎이 가득하다는 게 좋다. 그냥 화분을 보고만 있어도 향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는 것도.



나는 그 꽃이 필 때마다 네 생각을 했다. 그 향을 맡을 때마다 네 생각을 했다. 향기롭지만 살짝 무거운, 그 적당한 꽃 향이 너랑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거실의 천리향이 작은 꽃을 피웠다. 향이 온 집을 가득 채운 느낌이다. 그 화분을 보면 그냥 너 같다. 잠깐의 그 향기로도 아주 한참을 행복하게 해 주고 다가올 봄을 기대하게 해 주고.
나에겐 네가 그랬다.
널 생각하면 우리가  나눈 시간의 길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중요한 건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뭘 느꼈는 가겠지. 짧은 향기 속 긴 여운을 남긴 너처럼.
난 이제 네가 슬프지 않다. 여전히 너는 푸르고 나는 너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나는 힘들 때 너 자체로 그냥 위로받기에.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물리적 거리가 좀 더 멀어졌을 뿐. 그뿐.

보고 싶어.

매거진의 이전글 그 날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