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사빛 Dec 18. 2020

그 날은,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그 날은 정말 운수가 없는 날이었다.


4년 전이었을 것이다. 결혼 후 재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30군데는 넘게 넣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약속을 한 듯, 연락이 오질 않았다. 재취업의 길은 정말 멀고도 험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자격증도 더 따고 자기소개서도 더 다듬고 각종 카페에서 정보도 얻고. 정말 많이 노력했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면접을 보러 오란다.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최대한 단정하게 입고, 예상 면접 질문을 달달 외워가며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지긋이 나이가 드신 남자 두 분, 여자 한 분이 앉아 면접을 진행했는데, 분위기도 좋았고 내 스펙도 만족스러워하셨고 그래서 꽤 괜찮게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언제부터 출근이 가능하냐는 꽤 디테일한 질문을 받았을 정도니까.

그런데, 집에 돌아가는 길에 불합격 문자를 받았다. 전화를 걸어 이유를 물어보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 기혼이시고, 아이가 너무 어려요. 야근이나 회식 등 회사 생활에 집중이 힘드실 것 같아서요.

사장님께서 남자분을 선호하셔서 저희는 그렇게 하기로.......


꽤 냉정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그냥 전화를 끊었다.


이건 무슨 감정이지.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럼 처음부터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지를 말든가. 처음부터 여성 기혼자에 대한 색안경이 있는 상태에서 나를 떠본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날 운이 없었던 건 그뿐이 아니었다.

잘 입지 않는 스커트를 입은 탓인지 스타킹에는 올이 나가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고 그러나 주변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집주인은 전세 만기 보름 전에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5천만 원을 더 올려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벽에 못을 박았는지, 집을 깨끗하게 썼는지 한번 보러 오겠단다.

그 당시 집주인에게 에어컨 설치를 물어봤었는데 벽을 뚫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에어컨 설치는 절대로 안된단다. 자기 집이 상한단다. 그러므로 에어컨을 설치하려면 벽을 뚫지 말고 설치하란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좀 알려주고나 끊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러는 주인 놈 너는 너네 집에 에어컨 벽 안 뚫고 설치했겠지....? 고맙다. 그래서 네 덕에 집 샀다.)

집주인 전화 후 당이 급격히 떨어져 아주 달달한 커피를 테이크아웃했는데, 나오자마자 손을 헛디뎌 다 쏟아버렸다. 한 방울도 못 마셨는데.

구두와 옷이 흠뻑 젖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오늘은 귀신이 씐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꺼번에 이럴 수는 없다.

재취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던 차에, 이런 일을 반나절만에 한꺼번에 겪으니 억울함과 슬픔과 서러움과 화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돌아가는 길에 남이 보든가 말든가 마스카라가 지워질 때까지 울었다. 아마 그 날 누군가 내 모습을 봤다면 뇌리에 꽤 오래 남았을 것이다.

여자 판다가 울면서 지나간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꼴이었으니.


일단 멘탈이 나간 것보다, 스타킹에 올이 나간 게 가장 거슬리고 부끄러웠기 때문에 대형마트를 찾아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찌어찌 스타킹을 처리하고 나와 손을 씻는데, 화장실 스피커에서 나오던 그 음악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여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서 있었다.



아무도 그댈 탓하지 않아

가끔은 실수해도 돼

누구든 그랬으니까

괜찮다는 말

말뿐인 위로지만

누군가의 한 숨

그 무거운 숨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당신의 한숨

그 깊일 이해할 순 없겠지만

괜찮아요

내가 안아줄게요



음악이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엉망인 내 하루를 처음부터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랬다. 그 날은 한숨을 쉬는 것도 사치일 정도의 날이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문득 그 노래가 생각이 났다.

엄청 궁금했다. 누구의 노래인지, 누가 만들었길래 가사를 저렇게 예쁘게 썼는지.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식의 노래는 참 많이도 들었지만 누군가의 한숨 속에 들어있는 그 많은 감정까지 알아주고 안아주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는 이 노래뿐 아니라, 위로의 곡을 꽤 많이 썼다. 본인이 느끼는 삶의 무게를 토대로 타인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내일은 더 좋은 일이 가득할 거라는 예쁜 말들의 가사를 참 많이 썼다.

만난 적은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음악에 마음을 많이 기댔고, 그래서 그의 음악을 참 많이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3년 전 오늘, 그는 하늘의 별이 되었다.


나는 그의 음악으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는데 정작 그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못 전했다. 그게 가장 미안하다.

팬데믹으로 힘들었던 올 한 해, 난 유난히 그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 만약 그가 지금 팬데믹의 이 상황을 겪고 있다면, 무슨 말을 했을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어떤 음악을 썼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올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고 기억한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음악이 남아있고 목소리가 남아있어서, 그래서 오늘도 나를 위로해줄 수 있어서 참 고맙고 다행이다.


달의 반대편이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하다던 그는, 결국 그것을 보았는지 궁금하다.


그곳에서는 늘 평안만 깃들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아빠, 메리 크리스마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