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구슬이 한 무더기가 생겼다. 얼마 전 어린이날에 선물로 받은 것 같은데, 손가락 한마디도 안되는 작은 구슬들 50개와 그보다는 좀 더 큰 중간 구슬 10개였다. 구슬을 갖고 놀아본 적이 없었는지 아이들은 바로 내게 와서 구슬놀이를 하자고 한다. 우리 아이들도 여느 아이들과 같이 구슬을 누나와 동생이 똑같이 나눠서 각자의 주머니에 담았다. 서른 개의 구슬을 각자 갖고 있으면서 실제 갯수가 맞는지 수시로 세어보는 것이 귀여워 보였다.
구슬로 할 수 있는 몇가지 게임을 첫째와 해봤다. 작은 구슬로만 일단 12개씩 나눠가졌다. 바닥에 선을 그어놓고 한 사람씩 구슬을 굴려 그 선에 더 가까이 멈추게 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힘 조절만 잘 하면 이길 수 있는 승부였다. 나는 승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터라 어느정도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게만 해주었다. 적당히 힘조절을 해가며 아쉽게 질 정도로 패배하였다. 딸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기뻤다. 딸과 노는 시간 자체가 중요하지 내가 거기서 이기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져준다는 것만 눈치채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두번째 게임은 중간 구슬 하나를 바닥에 놓고, 약 5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구슬을 굴려 맞추는 게임을 했다. 처음에는 이것도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적당히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나는 구슬을 맞추지 못했다. 나중에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맞춰보려 했지만 결국 완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딸아이가 날 위로해주는 씁쓸한 경기였다. 그래도 그 위로 속에 비치는 기쁨의 미소를 나는 분명히 확인했다.
마지막 게임은 홀짝 게임이었다. 기본 방식은 이렇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에 세개의 구슬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여준 후 구슬을 양손에 나누어 든다. 어느 손에 몇개의 구슬이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보이지도 않게 한다. 그리고 한쪽 손을 내밀어 홀수인지 짝수인지 맞추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답을 맞추기 전에 자신의 구슬을 일정 수만큼 걸어서 정답을 맞추면 상대의 구슬을 그 수만큼 가져가고, 틀리면 상대에게 내어주는 방식이다.
나는 아이가 답을 선택해서 말하면 최종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면 답을 바꿀지 말지 고민하는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 혼란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상대가 바꿀 기회를 주는 것이 오답으로 유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는 그저 재미를 더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그렇게 아이는 내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눈치를 살핀다. 내 앞의 아빠가 나를 속이려고 하는건지 아니면 도움을 주려고 하는건지 고민을 한다. 결국엔 자기의 처음 선택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고 공교롭게도 대부분 옳은 선택이었다.
반대로 아이가 손을 접을 때는 재밌는 상황이 발생한다. 아빠가 자기 손을 보지 못하도록 두더지가 땅에 숨는 것마냥 구석까지 떨어져서 양손에 구슬을 나누고 돌아온다. 여기서부터 눈치를 살피는 쪽은 내가 된다. 내가 아무 생각없이 "홀수인가?" 하고 물으면 아이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러면 다시 "아니 짝수인가" 하고 말하면 살짝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잡아낸다. 분명 짝수구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홀수로 해야겠다" 하고 말하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을 펼쳐보이며 자기가 이겼다고 선포해 버린다. 아이는 내게 최종적으로 바꿀 기회를 줄 생각이 없고 승리가 눈앞에 보이면 그냥 쟁취해 버린다.
우리의 구슬 놀이는 나의 완패로 끝났다. 그러나 우리 모두 승리한 윈-윈 게임이었다.
큰 아이는 나중에 동생과 홀짝 게임을 하면서 심리전을 펼쳐보려 노력했지만 동생은 전혀 걸려들지 않았다. 아이들이 구슬로 노는 것을 보니 내가 가르쳐주지도 않은 다양한 방식의 게임을 창의적으로 하고 있었다.게임은 이겨서 좋은 것도 있지만 즐겁게 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 아이들도 즐겁고 정당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