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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Dec 21. 2023

부모가 쌓은 덕은 자식에게 간다

'분란'



친척 A가 결혼식을 합니다.


제 머릿속 친척 A의 이미지는 '확성기'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분란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 


분란은,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움.

입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저로써는 멀리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입이 가볍고 남의 불행을 옮기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 한 명 정도 떠오르시나요? 친구라면 애초에 끊어냈을 사람. 나중에 일이 커져 당사자가 화를 내면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도리어 불쌍한 척을 하는 사람.

저희 외가는 머릿수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다양한 구설수들이 돌기 좋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굳이 사건이나 구설수를 만들고 부풀려 계속 봐야하는 친척들 사이에 던져 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들어보니 친구 다 필요 없더라. 남는 건 가족밖에 없어."


제게 연락 좀 하고 살라면서 하던 이야기입니다. 음, 저는 좀 생각이 다르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까요.


어찌 되었건 자신은 외동이라 외로우니 저를 친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싶다며 도리어 타박을 놓습니다. 연락을 안 하는 것이 서운하다고요. 그렇게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었는데 어쩌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을는지. 그런 걸 보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친하지 않은 친척을 챙기다 또 제 얘기가 다른 친척들에게 구설수로 오르느니 그냥 매정한 사람이 되는 게 낫겠다 싶더군요.


20대 여자는 책을 놓고 화장품을 사들여야 한다던, 방에 책장이 있는 건 쓸데없는 돈낭비라고 말하던 친척 A가 드디어 자신의 가치관에 맞게 결혼을 합니다. 애사에는 한밤중에라도 꼭 참석하지만 경사에는 굳이 참석하지 않는 저는 굳이 갈 필요가 없다 여겼습니다. 어머니의 협박이 있기 전까지는요.


"엄마도 집에 안 들르고 결혼식만 갔다가 다시 내려갈 거니까 엄마 얼굴 안 볼 거면 오지 마."


이럴 수가. 머릿 수를 채우려고 친척들을 동원하다니요. 그냥 결혼식장을 좀 작게 잡든지. 천만원짜리 웨딩드레스를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평화로운 주말이 공격받을 위기에 괴로워하다가 문득 이모부를 생각했습니다. 이번 연도에 받았던 고마움이요.






2023년 5월, 절연한 지 10년 째인 아버지가 급사하셨습니다. 연락이 닿지 않고 살았는데 죽고나니 어머니께 연락이 닿았습니다. 어머니가 그래도 자식도리는 하라며 제게 전화를 하셨죠.

정말 우연찮게도 그날은 제가 연차를 쓰고 모처럼 쉬고 있던 날입니다. 만약 직장에 있었다면 남양주 산골에서부터 서울까지 달려갈 뻔했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습니다.


친가와도, 아버지 지인들과도 아무 안면이 없는 세 남매였습니다. 그나마 저만 어렴풋이 기억이 있어 제가 손님과 친척들을 맞았습니다. 동생들은 자신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내가 왜 여기 와서 3일 동안 있어야 해? 눈치 봐가면서?"

"마지막이잖아. 나중에 혹시라도 마음에 찜찜한 거 없으려면 그래도 할 도리는 하는 게 나아."


이제 막 기말고사를 끝냈던 막냇동생을 달래며 저희는 어색하기만 한 상주완장을 고쳐 매어 주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보수적인 친가 친척 한 분이 젊은 자식 세명의 기를 죽여보려 시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상주 자리에 아무도 없다며 소리르 지르고 화를 냈습니다. 버릇이 없답니다. 셋 모두 손님이 와서 잠시 응대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요.


이후 동생들 기를 죽이고 싶지 않아 악으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상주자리에서 버텼습니다. 아무도 함부로 말 못 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는 실감도 나지 않고 가슴이 미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도리를 다해 이곳에 와 상주에 서주는 걸 고맙다 말하기는커녕 이곳저곳에서 훈계질을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용서하라며 옹호하려 드는 모습이 같잖았습니다.



몸보다 마음이 지치던 때, 처음으로 눈물이 났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모부가 오셨을 때입니다. 

외가 쪽 친척들은 아버지와는 남보다 먼 사이이기에 부의금만 보내주시고 아무도 오지 못한 때였습니다.


"고생하네."


그런데 이모부가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장례식장에 오셨습니다.


내가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사람.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의 사정을 아는 사람.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어른이 이 공간에 나타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모부 입장에서도 이곳에 오시기 힘드셨을 텐데도 자리해 주신 데에 대한 고마움, 죄송함, 그럼에도 드는 안도감.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응어리졌습니다.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두 손으로 내민 손을 잡고 가만히 서 있자니 말 안 해도 안다는 듯 웃으며 다른 손으로 맞잡은 손 위를 토닥이셨습니다.


동생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있던 버틴다는 심정. 곡소리를 내지 않는다 버릇없다는 친가 친척. 아버지의 애인은 그 자리에 판을 깔고 아버지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다 가고, 동생들은 얼굴도 모르고 그 사람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는데.


이 공간의 모든 게 싫어지는 와중에 등장했던 어른이 참 좋았습니다. 별말 없이 밥 한술 뜨고 갔던 어른이 왜 그리 고마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친척 A의 결혼식에 간다면, 어머니의 협박 아닌 협박보다 그때 장례식에 와준 이모부의 얼굴 때문일 겁니다. 부모의 덕은 자식에게 간다고 하던가요. 요즘은 루푸스로 우측 목신경과 위에 염증이 생겨 오래 앉아있기도 차가운 바람을 쐬기도 힘든 몸상태이지만 진통제를 탈탈 털어 넣고 머릿수라도 채워 넣어보려 합니다.


참으로 오랜 기간 감사함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신다면, 할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노력할 것 같군요. 설령 그가 아니라자식인 친척 A의 일로 내려간다고 해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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