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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함 해보입시더

부산, 롯데, 그리고 최동원

by papamoon

부산이라는 도시는 바다를 닮았습니다.

때로는 거친 파도처럼 성정을 드러내고, 때로는 고요한 수면처럼 깊은 정서를 품습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다가도 한없이 포용하는 그 이중성 속에, 언제나 야구라는 이름의 맥박이 고동치고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야구는 단순한 경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 도시의 혼이자 언어였습니다. 사직구장의 외야석은 늘 함성과 열정으로 출렁였고, 승패를 초월한 응원의 목소리들이 밤하늘까지 치솟았습니다. 견제구 하나에도 천둥처럼 터져 나오는 “마! “라는 외침 속에는, 이 해안 도시만의 고유한 기질과 박동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야구는 이 도시의 방언이자 감정의 온도계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견디고 있는지를 롯데 자이언츠라는 이름에 의탁하여 확인하곤 했습니다. 롯데가 승리하는 날이면 부산의 공기마저 축제처럼 들뜨고, 패배하는 날에도 이 도시는 응원의 불꽃을 결코 꺼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롯데가 기적 같은 역전극을 펼치는 날이면, 부산은 자이언츠라는 깃발 아래 하나의 거대한 심장이 되어 뜨겁게 고동쳤습니다.


제 유년의 기억 저편, 바다빛 유니폼을 입은 한 사내가 마운드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사직의 수만 관중이 숨을 죽인 채 그를 바라보았고, 포수 미트에 꽂히는 공 소리는 그 어떤 웅변보다 또렷하게 진심을 전했습니다. 그는 화려한 몸짓 하나 없이 묵직했고, 무언가를 말로 설득하기보다 온몸으로 증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던진다는 것은 그에게 기교가 아니라 철학이었습니다.

기록을 쌓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볼 하나, 스트라이크 하나에도 그의 영혼이 실려 있었습니다.


등번호는 11번. 에이스가 흔히 선택하는 1번 대신, 두 개의 기둥처럼 굳건히 버티겠다는 의지를 등에 새겼습니다. 그 숫자는 어느새 이 도시가 사람을 품는 방식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 화려하지 않지만 흔들리지 않는, 조용하지만 끝까지 견디는.


1984년의 가을. 그는 한국시리즈 7경기 중 4경기에 올라섰고, 그 4경기를 모두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하루를 쉬고도 다시 마운드에 올라, 흔들림 없이, 묵묵히 공을 던졌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과의 약속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투구 하나하나에는 기술보다 마음이 먼저 실려 있었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서 단순한 승부를 넘어 삶을 대하는 자세를 읽어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헌신이 늘 찬사로만 보답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의 선수들이 대부분 그랬듯, 정당한 대우보다 인내를 먼저 배워야 했고, 상처받은 몸을 감내하는 것이 곧 충성심으로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그 침묵의 관습을 깨뜨리기로 했습니다.

야구만 잘하는 선수로 남지 않고, 야구라는 세계를 조금 더 올바른 곳으로 이끌기 위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 용기의 대가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팀을 떠나야 했습니다.


사직을 등지던 그의 뒷모습은 팬들의 가슴에 아물지 않을 상처로 남았지만, 그 선택이 품고 있던 고요한 품격은 지금도 이 도시 어딘가에서 조용히 맥박치고 있습니다.


야구는 명확한 규칙을 가진 경기입니다.

하지만 어떤 투수의 등판은 통계를 초월해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집니다. 최동원. 그는 승수보다 품격으로 기억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지켜낸 사람. 무너져도 굴복하지 않으려 버텼던 사람. 결국,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기 위해 끝까지 견뎌낸 사람.


그는 부산의 투수였습니다.

이 도시의 혼을 고스란히 체현한 사람. 이기지 못해도 좋지만, 굴복하고 싶지는 않았던 마음을 지닌 사람. 바다처럼 깊고, 바다처럼 끝없이 너그러운 사람.


지금도 사직구장을 떠올리면, 바다빛 유니폼 너머로 조용히 그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그 이름은 더 이상 한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스스로를 부르는 또 다른 호명입니다.


그리고 하루가 버겁게 느껴지는 날이면, 저는 마음속에서 그 말을 다시 꺼내 듭니다.


“마, 함 해보입시더.”


그 말은 이 도시가 오랜 세월 품어온 의지이자, 그가 자신의 생애로써 완성해 낸 한 편의 시입니다.


그 울림 속에서 저는 오늘을 헤쳐 나갈 힘을 길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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