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대기부터 내려오는 미술관, 그 끝에서 만난 인생

[Guggenheim] 각자의 속도로 완성해 나가는 인생이라는 걸작

by papamoon


'나의 뉴욕 미술관 답사기' 연재의 종착역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위대한 유산,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아래 구겐하임)'입니다. 직선과 직각이 지배하는 맨해튼의 풍경 사이에서 구겐하임이 그리는 유려한 곡선은 그 자체로 이질적인 평온을 선사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올라 400미터에 달하는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내려오는 여정은, 앞만 보고 달려 온 지난 세월의 보폭을 차분히 되돌아보게 하는 사유의 길이 되어주었습니다.



구겐하임의 내부 구조는 관람객을 서두르게 하지 않습니다. 중력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걷다 보면, 타인의 속도에 구애 받지 않고 오직 나만의 리듬으로 작품과 대면하게 됩니다. 지천명을 목전에 둔 지금, 제가 놓치고 살았던 것은 어쩌면 이 완만한 속도였는지도 모릅니다. 직선적인 성취를 위해 숨 가쁘게 전경을 꾸미느라, 그 풍경을 지탱하는 배경인 제 자신의 내면은 얼마나 소홀히 다루어 왔는지. 건축가가 설계한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내려가며, 저는 비로소 삶의 주파수를 '나'라는 본질에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구겐하임 미술관 내부 전경] 나선형으로 설계된 완만한 경사로는 타인의 속도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나만의 리듬으로 작품을 마주하게 합니다.


길 위에서 마주한 풍경



완만한 경사를 따라 하강하며 처음 마주한 카밀 피사로의 '에르미타주, 퐁투아즈'는 지극히 정직한 풍경이었습니다. 인상주의의 정신적 지주였던 피사로는 소란한 도심을 떠나 마을의 견고한 일상을 기록하며 마음의 안식을 찾았던 화가입니다. 찰나의 빛보다는 풍경의 안정적인 골조를 포착한 그의 붓 끝은, 우리가 갈망하는 미학이 거창한 성공이 아닌 매일 걷는 익숙한 길 위에 이미 깃들어 있음을 일러줍니다.



▲[Guggenheim 2층 Thannhauser Gallery] 카밀 피사로의 '에르미타주, 퐁투아즈(L'Hermitage, Pontoise)'


이어지는 빈센트 반 고흐의 '눈 덮인 풍경'은 아를에 도착한 그가 마주한 예기치 못한 정적을 담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멈춰버린 듯한 그 적막함은 오직 차가운 공기와 고요한 대지만이 존재하는 시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고흐는 이 텅 빈 겨울 풍경 속에서도 태양의 온기를 놓치지 않았지만, 화면에 남겨진 고독한 발자국은 보는 이의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힙니다. 고독은 때로 세상을 가장 투명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렌즈가 되어준다는 사실을 그는 나직이 일깨워줍니다.



▲[Guggenheim 2층 Thannhauser Gallery] 빈센트 반 고흐의 '눈 덮인 풍경(Paysage enneige)'


뜨거운 산맥과 소란을 벗어난 낙원



복도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고흐의 또 다른 걸작인 '생레미의 산맥'이 나타납니다. 요동치는 대지의 근육으로 표현된 이 그림은 정지된 풍경이 아닌 살아 꿈틀대는 거대한 에너지입니다. 생의 마지막 열망을 쏟아부었던 고흐의 필치는 인생의 중반을 지나는 제 안에도 여전히 뜨거운 산맥 하나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Guggenheim 2층 Thannhauser Gallery] 빈센트 반 고흐, '생레미의 산맥(Mountains at Saint-Remy)'


폴 고갱의 '바닐라 숲속의 남자와 말'은 타히티의 이국적인 색채를 빌려 우리에게 평화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짙은 노란빛과 초록빛의 숲은 문명의 소란을 피해 낙원을 갈망했던 고갱의 치열한 사유가 응축된 공간입니다.



낯선 숲의 고요 속에 머무는 그림 속 남자처럼, 길 위를 떠도는 여행자의 발걸음 또한 결국 화려한 바깥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가장 깊숙한 본질을 향해 가는 여정임을 작품은 조용히 일러줍니다.



▲[Guggenheim 2층 Thannhauser Gallery] 폴 고갱의 '바닐라 숲속의 남자와 말(Dans la vanilleraie, homme et cheval)'


생의 진실과 마주하는 용기



이어 마주한 에곤 실레의 '노인의 초상' 앞에서는 숨을 고르는 것조차 버거웠습니다. 비틀리고 앙상한 선들이 파헤친 노인의 형색은 어떤 수사로도 가릴 수 없는 생의 비릿한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는 소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인간의 실존을 목격하는 일은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아릿한 통증을 남깁니다. 화사한 젊음과 화려한 가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처연한 고독. 인생의 겨울에 서서 마주한 저 주름 깊은 얼굴은, 우리가 끝내 도달할 곳이 어디인지 소리 없이 웅변하며 마음을 깊게 흔들어 놓습니다.



▲노인의 초상[Guggenheim 2층 Thannhauser Gallery] 에곤 실레의 '노인의 초상(Bildnis eines alten Mannes)'


다정한 일깨움



그렇게 존재의 실존을 확인하며 도달한 구겐하임의 중심부에서, 저는 마침내 가브리엘레 뮌터의 '잠자는 아이와 엄마'를 만났습니다. 사실 그날 아침, 우리 숙소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간밤에 시작된 딸아이의 컨디션 난조가 아침이 되자 선명한 고열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구어진 아이의 이마를 짚으며 저는 모든 일정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딸아이는 아픈 와중에도 저를 배려했습니다.



"아빠, 나는 숙소에서 푹 쉬면 금방 나을 거야. 오늘 구겐하임은 아빠가 정말 기대했잖아. 나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딸아이의 사려 깊은 권유에 못 이겨 홀로 나선 길이었지만, 미안함과 걱정으로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무거운 마음을 안고 마주한 뮌터의 화폭 속, 엄마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깊이 잠든 아이의 발간 뺨은 숙소에 누워있을 딸아이의 얼굴과 너무나 닮아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품어내려면 먼저 내 안의 중심이 단단하게 여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뮌터의 선명한 윤곽선이 나직이 일러주는 듯했습니다. 그 다정한 일깨움은 아침부터 일렁이던 미안함 위로 가만히 내려앉았습니다.



▲[Guggenheim 2층 Thannhauser Gallery] 가브리엘레 뮌터의 '잠자는 아이와 엄마(Schlafendes Kind mit Mutter)'


미술관을 나서자마자 서둘러 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수화기 너머 다시 밝아진 딸의 목소리는 아침 내내 흐릿하던 뉴욕의 풍경에 비로소 채도를 입혀주었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거짓말처럼 열이 완전히 내렸다는 소식은, 나선형 복도를 내려오며 쌓였던 마음의 짐을 단번에 씻어주었습니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마주 앉은 식탁,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 너머로 어느덧 평온해진 아이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걱정은 김 서린 창밖으로 흩어지고, 그 자리에 우리만의 다정한 대화가 고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둑해진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의 첫날 우리를 축복했던 그 함박눈이, 긴 여정의 마지막 밤을 배웅하러 다시 찾아온 듯했습니다.



▲거짓말처럼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발. 여정의 마지막을 배웅하듯 하얀 축복이 창밖을 채웁니다.

거장들의 통찰을 길잡이로



4주간의 연재를 갈무리하며 깨닫습니다. 이번 답사를 통해 제가 건져 올린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정직하고도 깊은 회복의 감각이었습니다. 나를 투명하게 응시하는 시간 끝에야 비로소 타인을 온전히 품을 수 있다는 지혜, 그리고 사랑의 본질은 내 속도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보폭에 발을 맞추는 데 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중년의 문턱에서 마주한 것은 지나온 길의 정리가 아니라, 거장들의 통찰을 길잡이 삼아 남은 일생을 더욱 밀도 있게 가꿔 나가야 한다는 가장 선명한 첫 문장이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소란하겠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의 속도로 저마다의 인생이라는 걸작을 완성해 나가는 중입니다. 뉴욕의 마지막 밤, 제 마음의 주파수는 사랑하는 이들과 이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기분 좋게 맞춰져 있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저의 글에 따뜻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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