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짐 속에서 꺼내본 우리의 삶

by 파파레인저

지금 사는 집에서 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하나였다.

딸이 학교에 가기 전, 새로운 동네에 천천히 적응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 그 동네는 ‘잠시 사는 곳’이 아니라 ‘살아가야 할 곳’이 된다.

그래서 동네를 고르는 일은 곧 ‘어떻게 살아갈지’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어릴 적 나는 서울 방화동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초,중,고, 대학, 심지어 결혼 전까지 한 동네에서 모든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살아보니 알겠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익숙한 동네와 친구, 기억을 두고 이사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서 이번 선택은 아이의 시간을 조금 더 넓게 열어주기 위한 작은 결심이었다.


문제는 이사 날짜가 매끄럽게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28일의 공백.

처음에는 에어비앤비나 한 달 살이 같은 대안도 떠올렸다.

하지만 현실적인 계산 앞에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여러모로 돈 들어갈 일이 많은데,

한 달 사이에 400~500만 원이 훅 빠져나간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정서적인 선택을 했다.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기.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아니, 사실 허락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사 준비는 생각보다 더 복잡했다.

한 번에 옮기면 될 일을, 우리는 세 번쯤 나눠서 하는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은 부모님 댁으로, 그 후에는 새로운 집으로. 짐을 옮기고 또 옮기며 깨달았다.

이사를 한다는 건 삶을 정리하는 일이라는 걸.


2년 동안 살면서 쌓인 짐을 들춰보면 늘 ‘발굴’이 시작된다.

“이런 게 여기 있었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물건을 들여놓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내보내는 일에는 서툴다.

자리를 잡지 못한 물건들은 집 안 어딘가로 밀려나고, 시간이 흐르면 존재조차 잊힌다.

‘언젠가 필요하겠지’ 하며 넣어둔 물건들이 이사 시즌이 되면 ‘까꿍’ 하고 다시 얼굴을 내민다.

충동적으로 들였던 자잘한 물건들. 결국 당근행이 될 물건들을 왜 그리도 붙들고 있었을까.

아마 그 시절의 나 자신을 너무 신뢰했던 탓이겠지. 이삿짐을 버릴 때는 이상할 만큼 가차 없다.

보관할 때는 금이야 옥이야 하며 모셔두던 것들이, 막상 버릴 때는 잠깐의 아쉬움 뒤로 바로 사라진다.

‘그때 왜 샀을까?’ ‘그때 필요한 사람한테 왜 안 줬을까?’ 후회들이 짧게 지나간다.


부모님 댁에서 지낼 28일을 위해 필요한 짐을 따로 꾸렸다.

이삿짐 박스 두 개에 귀중품, 옷, 생활 도구들을 가득 담았다. 이렇게나 많은 것이 꼭 필요할까 싶었지만, 아이가 있으니 짐은 늘 두 배였다.

짐을 싸고 있는데, 아내가 하나뿐인 명품 가방을 가장 먼저 조심스럽게 박스 안에 넣었다.

평소에는 짐을 잘 챙기는 편이 아니지만, 이 가방만큼은 유난히 꼼꼼했다. 생애 첫 명품 가방이었고, 그래서인지 그 안에 담긴 마음의 무게가 남달랐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마음을 얼마나 두고 있느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구나.

물건 하나에도, 관계에도, 일상에도 그 마음의 양만큼 더 신중해지고, 더 다정해진다. 시간이 더해지만 그 물건은 더욱 애틋해진다.

집을 꾸민다는 것도 결국 그런 일인지 모르겠다. 단순히 ‘집 안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진짜 의미 있는 것들을 신중하게 들이는 과정.

아무리 많은 물건을 들여놓아도 마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금세 흩어지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제자리를 갖는다.


짐을 차에 싣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엄마 차에도, 내 차에도 박스가 한가득이었다. “이럴 거면 이사도 우리가 할 걸 그랬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작은 방 한 칸에 짐을 풀어놓으니, 신기하게도 다 들어갔다.

들어갈 것 같지 않던 짐들이 자리를 찾아가고, 우리는 그 방의 리듬에 몸을 맞추기 시작했다.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이렇게 조금씩 나를 유연하게 바꿔가는 일인지 모른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내온 그 방에, 이제는 세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한 달, 그 한 달이 우리에게 어떤 시간을 열어줄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KakaoTalk_20251208_123030272.jpg 짐이 없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다 ㅎㅎ; 이사는 늘 그럿다.
KakaoTalk_20251208_123030272_01.jpg 아이들은 적응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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