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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peltina May 30. 2023

[미엘티's 파리노트] 프롤로그

5년 차 프랑스살이의 마지막 버킷리스트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

"오빠, 나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겠어"

한국에서 가져온 따뜻한 전기장판에 누워 핸드폰 속 와일드리프트 13연승을 달성한 바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간간히 속으로만 생각했던 결심이 결국엔 꼬물꼬물 빛을 보겠다며 나의 입 밖으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프랑스인들이 대 다수인 직장에서 둘이 함께 영어에, 프랑스어에 한없이 부대끼고 시달리다 퇴근을 하면, 누가 더 할 것 없이 늘상 둘 다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약속이나 한 듯 말없이 핸드폰으로 게임에 접속해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둘이 한편을 먹고 신나게 적진을 쳐부수고, 죽고, 죽이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인다. 직장 내에서의 소수민족(?)의 억울한 마음을 그렇게나마 달래는 일종의 우리 둘만의 의식인 것이다. 물론 게임서버 마저 유럽서버이다 보니 같이 하는 팀원들도, 적도 모두 유럽인인지라 게임 속 안에서조차 또다시 외국어에 부대껴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작은 화면 안에서는 그냥 'Go', 'Come'과 같은 간단한 말들만 반복하면 되기 때문에 한결 뇌가 수월해한다. 


어쨌든 우리만의 이 신성한 퇴근 후 스트레스를 날리는 의식에서 웬일로 13연승이라는 쾌거를 이뤄내서인지, 아니면 드디어 고민을 끝낸 나의 뇌가 타이밍을 못 잡고 실수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국으로 가겠다는 나의 말에 크게 동요없이 "갑자기 이 타이밍에?"라고만 물어보는 오빠의 동그란 눈을 보니 아마도 나는 또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해오며 입술 근처 어딘가에 이 말을 망설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이런 경우엔 오늘이 아니어도 언젠간 나올 일인 것이다.



프랑스 살이의 시작

2018년 5월, 프랑스 사람들조차 밖에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제일 예쁜 달에 우린 파리에 처음 도착했다. 20살에 혼자 '청춘병'에 걸려 작은 크로스백 하나 덜렁 매고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작정 걷고, 앉고, 보고, 느꼈던 파리가 못내 아쉬웠었는지, 나는 박사학위 졸업기념 여행지를 골라보라는 오빠의 깜짝 선물에 주저 없이 파리를 골랐었다. 10여 년 전 걸었던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독일 등의 8~9개 도시들 중 가장 마지막이었던 파리가 앞 선 도시들을 밀어내고 내 마음속 한 구석에 콕 박혀 한번쯤은 또 함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무렵 나는 대학원 졸업 후, 그동안 모은 돈으로 꼭 1년은 백수생활을 즐기겠다 선언했던 때라 일정에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오빠는 일을 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파리를 선택한 나를 위해 큰맘 먹고 오빠의 소중한 휴가 중 5일을 탈탈 털어 주말을 포함해 7박 8일의 일정으로 여행을 시작했었다. 


그때 우리의 파리 여행은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비루한 우리의 체력만 빼고 말이다. 

떨어지는 햇살이며 살랑이는 바람, 덥지도 춥지도 않은, 보들보들한 카디건이 딱인 그런 날씨가 초록빛 잔디 위에 서 있는 에펠을 더욱 사랑스럽게 했고, 반짝거리는 청춘 자체의 모습을 한 사람들이 모여 조잘대는 소리는 한가로이 흘러가는 센 강을 더욱 낭만의 강으로 만들었다. 가끔 눈 시린 햇살은 그대로인 채 소나기가 시원하게 퍼붓고 지나가기도 했지만, 그럴 땐 오빠 손을 잡고 뛰어 프랑스인들과 함께 어느 식당의 테라스나 처마 밑으로 가 비를 피하다 보면 그 순간마저도 내가 지금 어느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촬영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평소엔 하지도 못 할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꿈같은 파리건만, 나와 오빠의 체력은 하루, 이틀 만에 시차를 극복할 수 있는 체력이 아니었다. 한낮의 여유로움을 좀 충분히 즐겨보고 싶었지만 여지없이 오후 2시가 되면 나의 눈꺼풀과 다리는 한 없이 무거워져 갔다. 일분일초가 아쉬워 버텨보려 해도 결국엔 숙소로 돌아가 억울한 낮잠을 자야만 했다. 그 순간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건 큰맘 먹고 예약했던 숙소의 에펠뷰뿐이었다. '그래, 나는 지금 에펠이 보이는 잔디에 피크닉을 나와 있는 것과 다름없어'라는 스스로의 다독임과 함께 말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우리 둘만 뺀 나머지 모두가 완벽했던 7박 8일의 여행 중 우연히 만난 프랑스 교수님과의 면접으로 의도치 않게 직장까지 얻어 돌아올 수 있었고, 아쉬움을 뚝뚝 묻힌 나의 낮잠에 대한 그럴싸한 위로들은 어느새 벌써 프랑스 살이의 찬성 이유들로 바뀌어 내 마음 안을 뛰어다녔다. 그렇게 우리는 바로 그 해에, 내가 꿈꾸던 프랑스 살이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무려 5년의 직장생활을 견뎌내며 열심히 살아내고 있었다.



파리 노트의 시작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일을 쓰다 보니, 아마 그때의 내가 지금 옆에 있다면, 퇴근 후 이렇게 손가락 전쟁이나 하며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는 나에게 미쳤다고 머리를 절레절레하겠지 싶어 피식 웃음이 난다. 하지만 나를 14년 동안 옆에서 쭉 지켜본 오빠는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대답하기 적당히 곤란하고, 그러면서도 꼭 생각해보고 싶지만, 계속 외면하고 있었던 질문을 했다.


"돌아가기 전 아쉬움이 남는 게 있어? 아님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나"


돌아가기 전 아쉬움이 남을만한 일이라.. 

이공계열에 종사하는 나는 이곳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후에도 여전히 여러 종류의 핵산과 염기서열, 단백질들의 구조와 발현등을 측정하고 분석하는 일들을 했다. 익숙했던 일이지만 바이러스와도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 거의 입사하자마자 코로나가 창궐해 한국에서보다 오히려 더 바쁘게 지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이곳에 올 때 생각했던 한가로운 피크닉이나 산책 따위는 잊힌 채 퇴근하면 침대에 누워 자기 바빴고, 우리의 소중한 손가락 운동마저 못하고 잠드는 순간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언어조차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왔던 터라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프랑스로 국가만 옮겨진 채 나의 삶은 그대로였구나 하는 아쉬움이 피어올랐다. 


묘하게 처음 여행으로 왔던 파리에 대한 그리움이 떠올랐다. 

집에 있지만 집에 가고 싶은 마음처럼 프랑스에 있지만 프랑스에 가고 싶었다. 

'그래, 맞아. 여행에서 만났던 프랑스의 여유가 아쉬울 것 같아.'라는 잊고 지냈던 처음의 목적이 생각났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다니며, 그곳에서 느껴지는 내 생각과 감정들을 쏟아내는 일기나 노트 쓰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SNS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금손들과 같은 재능은 일 도 없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들 사이에서, 언제나 나는 해야 하는 일들을 선택해 왔다. 지금의 나의 직업은 과거의 내가 했던 선택들이자 내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렇다고 내가 내 일에 대해 후회를 하거나 실패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내 일에 꽤 만족하는 편에 가깝다. 하지만 나 역시 선택하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들은 늘 마음 한편에 있었다. 


"오빠, 나, 나만의 여행노트를 만들어보고 싶어"


아쉬운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자마자,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말만큼이나 불쑥 여행노트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말이 망설임 없이 튀어나왔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너무 확신에 찬 어조로 하겠다 말을 하니 뱉고 나서도 스스로 멋쩍어 배시시 웃었다.


"하자, 너 하고 싶어 했잖아. 너만의 여행노트를 만들어보자"


늘 그렇듯, 이런 나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오빠의 반응은 나에게 편안함과 동시에 안도감, 그리고 시도해 볼 용기가 된다. 

그렇게 나의 첫 여행노트 '파리 노트'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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