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식물 그리는 목요일 240725

03_감나무

by 고라니

오늘은 나무를 그린다. 나무 전체 모습이 아니라 잎사귀를 포함 일부만 옮기면 된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우산을 쓰고 조례호수도서관 주변을 돌면서 어떤 나무를 그릴지 살펴본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의 고요한 집중도 좋아하지만, 무얼 그릴지 돌아다니며 탐색하는 시간도 두근두근 즐겁다.


오늘은 뭘 그리게 될까.


나무에 친절하게 이름표가 걸려있어서 반갑다. 산수유, 먼나무, 매실나무, 벚나무, 은행나무, 칠엽수 등 생각보다 수종이 다양하다.


칠엽수라 해서 잎의 개수를 세어본다. 대부분 여섯잎이다. 일곱 개의 잎이 보여서 사진을 찍었다. 나무 위쪽에 딱부리처럼 가시 돋친 동그마한 열매가 달려있다. 칠엽수에는 자잘하고 많은 빗방울이 분사된 모양으로 펼쳐져 있고, 감잎에는 드문드문 빗방울이 맺혀있다. 감잎은 반질반질 광택이 난다. 방수 기능이 제법 좋아 보인다. 우산 같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잎맥은 잔손금으로 보인다. 식물을 그릴 때 무엇보다 잎맥에 집중하고, 흡사하게 옮기고 싶은 마음이 크다.


순천에 오기 전에는 주홍빛 가을 감만 보았다면, 이제는 봄의 감꽃, 여름의 감도 보인다. 감나무수피는 얼룩얼룩. 거칠고 너덜너덜. 뭔가 지키고 고되 보인다. 잎사귀 사이로 연둣빛 감이 쏙쏙 인사하듯 얼굴을 내민다. 감 하나가 보이기 시작하니 여기도 저기도 연둣빛 감이다. 귀여워.


식물 그리기 3회 차. 감잎과 감을 그리고 있다. 감을 그리는 동안 마음이 연둣빛으로 밝아진다. 밖에는 배롱나무 샛분홍 꽃이 꼬불꼬불 만발하고, 감은 가을을 향해 부지런히 익어가겠지.


연필로 꽤 정성 들여 스케치를 했다. 고민하다가 갈색펜으로 라인을 그렸는데 망.했.다. 무를 수도 없다. 연필선의 은은한 느낌이 사라졌다. 눌러 그린 펜선이 부자연스럽다. 특히 감이 인공적이다.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다. 이미 망했다는 생각에 채색도 공들이지 않았다. 식식대며 식식 순식간에 끝내버렸다. (소개팅 앞두고 손 덜덜 떨며 아이라이너 그리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소개팅도 전에 아이라이너가 먼저 망했었다.)


"망했어요. 펜으로 라인 그리기 전 연필 스케치가 더 나아요."

그림 지도 선생님께 하소연을 했다. 선생님은 잠시 가만히 그림을 보더니 말을 건넨다.


"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어도 나중에 보면 또 좋아질 수 있어요."


나중에... 선생님의 열린 대답이 나에게 희망을 준다. 위로가 된다. 그래 나중에. 지금은 집에 가자.



(방에 누워있는 엄마에게) "엄마! 오늘은 이거 그렸어."

"감이네."


(부엌에서 물 마시는 아빠에게) "아빠! 뭐 그렸게?"

"이게 뭐여. 몰라. 사과."


엄마는 감이 좋고, 아빠는 감이 없는 걸까... 사과라니... 아빠의 대답이 감을 다시 그리게 만든다. (불끈불끈) 연둣빛으로 감을 색칠하는데 며칠 전에 아빠가 한 말이 생각났다.


"벌써 퍼런 풋사과가 장에 나왔더라."

그래, 뭐, 풋사과라면... 마음이 풀린다.


집 마당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처음 순천에 와서 맞은 2020년의 봄날. 처음 본 감꽃에 감탄했다. 휴대폰 배경화면도 감꽃이다. 이후, 해마다 감꽃 필 무렵 들뜬다.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는 순환은 신기하다. 사실 감이 맛있는 줄은 모르겠다. 좋아하는 과일은 아니나, 그럼에도 감나무가 좋다.



240725_감나무 그림_01.jpeg
240725_감나무 그림_02.jpe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식물 그리는 목요일 24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