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

by 고라니

꽃분홍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새삼스럽게 손이 자꾸 봐진다. 마을 초입에 홍매화가 피었다. 앙상한 가지에 적색 꽃송이들이 다닥 붙어있다. 그윽하고 깊은 향, 무게감 있는 색. 기품이 배어 나온다. 붉은 꽃송이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삐져나온 노란 수술들이 막 돋아난 이끼처럼 싱그럽다.


욕심껏 세 권의 책을 다 챙겼다. 3월의 희망도서 이수명 '정적과 소음' , 에드워드 토머스 '나는 잠의 국경에 다다랐다.', 한은형 '그리너리 푸드_오늘도 초록'


'잠의 국경에 다다랐다'는 영어 원문이 있어서 필사해도 좋겠다. 맛깔난 '그리너리 푸드_오늘도 초록'은 한은형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정적과 소음은 아껴 아껴 읽어야지.


어제 오전에 독서 취약 아동 책 읽어주기 전문강사 모집 지원서를 이메일로 보냈다. 하고 싶은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을 오랜만에 만나서 솔직히 들떴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그림책을 읽어주며 살고 싶다'는 꿈과 희망에 부풀었다.

아이들과 읽고 싶은 그림책 목록을 정하고, 독후활동으로 무엇을 할지도 곰곰하게 적었다.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다니. 너무 좋다. 우린 어떤 이야기들을 주고받게 될까. 닉네임은 뭐라고 하면 좋을까. 방방쌤. 어떨까. 주로 아이들을 만날 땐 빵쌤이라고 소개했지만, 지금 내 들뜬 마음을 된소리 빵. 보다는 방방이를 타고 방방 날 것 같은 방방쌤이 적합할 것 같다. 아이들과 나. 그림책. 웃음. 감동. 지원서를 쓰는 동안 시뮬레이션이 저절로 돌아갔다. 앞선 마음. 수업 몇 차시는 이미 치른 느낌마저 들었다.


강사 이력을 적는 세 칸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좀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래도 그림책과 아이들에 대한 열정이 뿜뿜하니, 경력보다는 열정을 알아봐 주지 않을까.


오후에 산책을 가는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지원서를 제출한 삼산 도서관 번호여서 전화를 걸었다. 담당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불합격임을 예감했다. 선생님~ 하고 나를 부르는 말투에 미안함이 새어 나왔다.


나에게 독서 지도사 자격증이 있는지 물었다. 독서지도 전문강사 모집이고 강사료가 6만 원 지급되므로 자격증이 필요하다. 내가 자격증 적는 것을 누락했나 싶어서 전화를 주셨다 했다. 자격증이 없다 하니, 올해는 함께 하지 못하겠다며 조심스레 말을 건네신다.


이 홀가분함은 뭘까. 떨어졌는데 씁쓸하거나 아쉽기보다는 바로 수긍이 되었고 내가 무얼 해야 할지. 오히려 분명해졌다. 마음만 가득한 일. 역시 거저먹으려 했구나. 자격조차 안 되는데 그래도 지원서를 작성하면서 내가 어떤 그림책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싶은지, 어떻게 늙고 싶은지는알게 되었다.


지원서를 넣기 전부터 마치 전문강사가 된 마냥 엄마 병원 일정 때문에 수업 요일을 맞출 수 있을지. 계속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 때문에 전전긍긍 댔는데 정작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미리 사서 걱정을 했구나. 엄마 때문에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사라지니 되려 마음이 편했다.


엄마 핑계, 탓을 할 필요가 없는데 나는 요즘 그러고 있다. 비겁하고 치사스럽다. 왜. 나와 엄마를 분리하지 못하고 내가 엉겨 붙어서 서로를 괴롭힐까. 내가 보태지 않아도 엄마는 악화되는 병증 때문에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잘해드리지는 못하고 계속 엄마 핑계를 댄다. 내가 못난 걸 엄마 탓한다. 살찐 것도, 확 늙어버린 것도, 우울한 것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일어나고 싶지 않은 것도...


정신이 든다. 정신을 차린다.

엄마 미안해.

나 대로 나를 일으켜볼게.

살짝 봄기운 도움은 받을게.


취나물 씨앗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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