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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종관 Sep 03. 2015

사람 곁에 사람, 박래군

평택의 대추리, 용산의 남일당,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유가족 곁을 지나 지금은 서울구치소 1.5평 독방에 갇혀 있는 인권운동가 박래군. 그는 언제나 그런 곳에 있었다.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고등학생 박래군의 꿈은 소설가였다. 수원에서 자취를 하며 소설에 인생을 걸겠다고 결심하였다. 재수생활을 거쳐 1981년 연세대 국문과에 진학한 박래군은 문학동아리인 연세문학회에 입회했다. 당시 문학회에는 기형도, 성석제, 원재길 등 학생 작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박래군은 그곳에서 우상호, 공지영, 김응교 등과 함께 글을 썼다. 1학년 가을, 박래군의 작품 ‘땅강아지’가 교내 문화상 소설부문(박영준문학상)에 당선됐다.

이미지 출처: 한겨레 21 [제919호] '박래군씨, 왜 그렇게 사세요?'

*사진 : 1979년 박래전의 중학교 졸업식 직후 기념촬영을 한 박래군(왼쪽). 박래전 열사 추모사업회 제공



하지만 문학청년의 꿈은 거기서 끝이었다. 박래군은 그해 11월 교내 시위에 휘말려 학생회에 들어가게 된다. 1983년 4월 과 학생회장으로 학내 시위를 주동하다 경찰에 붙잡힌 박래군은 강제 징집되었다. 강원도 양구에서 군복무를 한 뒤, 1985년 여름 제대한 박래군은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인천으로 갔다. 공사용 목장갑을 만드는 공장에 위장 취업한 박래군은 회사가 일거리가 없다며 공원들을 무더기로 해고하자 일일파업을 주도해 복직을 따냈다. 이 때문에 신분이 들통나 쫓겨났다.

1986년 5월 30일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인노련(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 소속 해고근로자 16명이 반미구호를 외치며 한미은행에서 점거농성을 벌였다. 창틀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는 임무를 맡았던 박래군은 이 사건으로 구속됐다. 공교롭게도 당시 박래군의 모습이 9시 뉴스 화면을 타는 바람에 고향이 발칵 뒤집혔다. 이웃들은 자신들에게 피해가 갈까싶었는지 발길을 끊었다. 그러다 87년 7월에 박래군이 가석방되자 ‘동네에서 애국자가 났다’며 축하했다고 하지만 당시 부모님은 아픔을 많이 겪으셨다고 한다. 박래군은 항소심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영등포교도소와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1987년 7월, 6월 항쟁 덕분에 형기를 1년이나 남겨두고 가석방된 박래군은 곧바로 노동운동에 복귀하고자 했으나,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할 때 징벌방에서 허리를 다쳐 현장에 바로 복귀하는 것이 어려웠다. 졸업만 해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에 88년 박래군은 복학했다.

*사진: 민중해방열사 고 박래전님은 이 땅의 부끄럽지 않은 사람, 참된 시인이고자 했읍니다


88년 6월 4일, 숭실대학교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박래군의 동생 박래전이 분신했다. 당시 비공개수배 상태로 학생회관에서 숙식을 하던 박래전은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를 외친 후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박래전은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인 6월 6일 숨을 거둔다.

*사진 : 박래전 열사의 희생을 기리며 민주화를 위한 구호를 외치는 모습


박래군은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평소 주위사람으로부터 ‘창자가 이어져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끈끈한 사이였던 형제였던 박래전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동생의 죽음으로 박래군은 ‘유가족’이 되었다. 그리고는 생소한 유가족들과 어울리게 되고, '재야'라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할 때는 말로만 듣던 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을 만나게 된 것도 그런 인연에서 시작됐다. 한참을 방황하다 이소선 여사의 권유로 민주화실천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 발을 들였다. 1988년 10월에 처음으로 박래군은 전국의 의문사 유가족(35가족)과 함께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했다. 유가족들이 "추운 겨울에 하루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며 서명을 받고 들어와서는 시멘트 바닥에 스티로폼 한 장 깔고 주무시는 모습이 안쓰러웠다"고 박래군은 이야기한다. 

이미지 출처 : 한겨레 21 [제1072호]박래군의 배후는 ‘시대가 죽인 사람들’

*사진 : 1990년 5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조선대생 이철규의 의문사 진상 규명을 위한 단식농성에 함께하고 있다.


박래군이 유가협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어머니·아버지들과 정이 들어버린게 컸다. 당시 유가협의 실무자는 겨우 한 명. 박래군은 농성을 지원하는 일을 하다 아예 유가협의 사무국장을 맡게 된다. 그렇게 박래군은 노동운동에서 인권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93년까지 박래군은 유가협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의문사 진상규명과 온갖 학생, 노동자 사망 사건을 처리했다. 그는 전국을 떠돌며 ‘장례사’ 역할을 했다. 그가 직·간접적으로 장례를 치른 ‘열사들’만 50명이 넘었다.


<강민호, 강현중, 권미경, 김봉환, 김윤기, 김종수, 김종하, 김처칠, 박복실, 박성호, 박진석, 박창수, 배주영, 석광수, 신용길, 오원석, 원태조, 유재관, 윤용하, 이광웅, 이상남, 이상모, 이영일, 이재호, 이종대, 이진희, 임혜란, 임희진, 조정식, 최동, 최성근, 최성조, 최완용, 최태욱, 강경대, 고재욱, 기혁, 김귀정, 김기훈, 김수경, 김영균, 김용갑, 김철수, 남태현, 남현진, 류정하, 문승필, 박승희, 박현민, 손석용, 송종호, 신장호, 심광보, 윤재영, 이내창, 이상렬, 이철규, 정성묵, 천세용, 최응현>

* 박래군이 장례를 치른 열사들의 명단은   유가협 홈페이지를  참고하였다.


1993년 6월 박래군은 의문사 실상을 알리러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엔세계인권대회에 비정부기구(NGO)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인권운동을 양심수 석방 투쟁이나 고문 추방 캠페인, 의문사 진상 규명 활동 같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일부로 여겼던 박래군은 아동인권, 노동자 인권 등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문제들이 이야기 되는 것을 보고 인권을 독자적인 운동으로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후 박래군은 유가협 활동을 정리하고 본격적인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서준식의 인권운동사랑방에 들어간다.


서준식은 1971년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97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을 판결 받았다. 그는 징역 7년 만기를 채웠음에도 '사상전향'을 거부함으로써,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이 내려져 10년을 더 감옥에 있어야만 했다. 1988년 출소한 서준식은 빈민들과 함께하며 글쓰기를 하겠다던 소박한 꿈을 꾸었지만,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거치며 서준식의 꿈은 인권운동가로 수정되었다. 서준식은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을 창립했다. 박래군은 인권운동사랑방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인권운동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박래군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고문피해자 구제활동, 교도소 재소자와 시설 수용자의 인권 개선을 넘어 주거권 확보와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같은 사회적 운동으로 확장하여 활동하였다. 

*사진 : 이 사료수집상자 안에는 박래군의 활동 내역이 담겨있다.


1991년 5월 8일 당시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의 분신 사건에 대해 검찰은 김기설의 친구였던 단국대학교 김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기소했다. 당시 서준식 씨 등 각계 인사들은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는 여러 증거를 제시하며 한달여 동안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94년부터 인권운동 사랑방 소속의 서준식과 박래군은 ‘강기훈 무죄석방 공동대책위’를 만들어 3,000쪽짜리 유서대필총자료집을 만들어 김기훈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했었다.  

*사진 : 유서사건 총자료집 발간 기념회에서 연설하는 서준식



인권운동 사랑방에서 활동을 지속하던 박래군은 사랑방을 나와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든다. 시민들의 모금을 통해 2013년 민간독립 인권센터 ‘인권중심 사람’을 세웠다. 인권중심 사람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인권에 대해 배우고, 고민하고, 실천하면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의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차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존중받으며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 억압의 주체가 아니라 의무의 주체로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그런 세상에 대한 꿈, 인간의 존엄성과 더불어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평화가 실현되는 그런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밀고 나갑니다.

박래군이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인권중심 사람에서는 실제로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위원회, 416지킴이활동, 밀양송전탑 반대, 남산인권순례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권리 증진에 힘쓰고 있다.

*사진 : 남산인권순례 - 향린공동체 한마당



박래군은 최근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하다 구속이 됐다. ‘416국민연대’ 상임운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검찰은 박래군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및 특수공무집행 방해 등을 이유로 구속하였다. ‘세월호 추모집회를 주도’했다는 것이 구속 사유였다. 그는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며, 현재 문화예술인모임과 416국민연대, 인권재단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인권활동가 박래군 석방 촉구 문화제'를 개최하는 등의 그의 석방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여전히 그는 사람 곁에 있다.


이미지 출처 : 민중의소리            “사람곁에 사람이 있는 것이 죄인가? 박래군을 석방하라”       

*사진 : 문화예술인모임과 416국민연대, 인권재단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개최한 '인권활동가 박래군 석방 촉구 문화제'에서 시민들이 석방 촉구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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