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너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풀씨 Jan 19. 2024

너에게_1988년 7월 4일_우리의 555일

2024 01 19 금

너에게


다시 편지 상자를 열었어. 

너의 편지 한 장을 찾으려면 친구들의 편지들을 일일이 살펴봐야 하고

그러다 보면 또 시간을 잡아먹게 되니 썩 내키는 일은 아니야.

하지만 네 편지가. 너무 찾고 싶으니까. 마음을 먹었지.

이번에도 그 편지는 찾지 못했어.

대신 놀랍게도 다른 편지를 또 찾았어. 

보물찾기 하듯. 너는 나에게 줄 미래의 기쁨을 숨겨놓은 걸까?

나에게 기쁨을 줄 수 없어 괴로워하던 너를 이젠 잊었겠지?(웃음)


아무튼.


난 그 편지를 읽으면서

그 편지를 받았던 날의 내 기분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었어.

네가 뭐라고 했냐고? (웃음)


우린 각각 야영을 다녀왔어.

네가 먼저 갔다 왔고 그다음에 우리 학교가 갔었어.

그래서 너는 내가 너와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게 기쁘다고 했고.

교관이 부모님께 편지하라고 했는데 내가 그 명령을 어기고 

너한테 편지를 써서 기뻐했어.

넌 복종(네 말에 따르면)했지만(웃음)

난 내 마음대로 했으니까(웃음) 넌 내가 조금 대견했을까?

귀엽지? 

넌 우리가 만나면 제일 먼저 이 이야기(야영)를 하자고 했어.

하지만 네가 

"너와 난 만나면 너무 그리워한 탓인지 할 말은 못 하는 것 같다."라고

쓴 것처럼 우리는 늘 말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으니까

그렇게 했는지 궁금해. (웃음. 이 바보들)

그리고 때로 내가 너의 마음을 안 좋게 하는 말을 하곤 했던 거 같아.

네가 인용한 내 말들은 좀 예쁘지가 않아.

내가"반복되는 행동을 반복"한다고 했나 보지...

어쩌면 난 그렇게 못돼먹었을까...

내가 무척 목적지향주의적이라는 것을 요새 많이 깨달아.

아마 싫었겠지. 의미 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을 그 시간들이.

뭔가 알차고 확실한 것들을 하고 싶었을 거야. 

그저 서로 머뭇대다 헤어지는 건 

내 성향에 맞지 않았겠지. (웃음... 미안... 나 그런 성향인 거 요즘 알았어.)


그렇게 네가 7월 4일에 쓰고

7월 7일에 또 썼어. 그리고 한 봉투에 넣어 보냈지.

넌 겨울 방학에 친구 3명과 완도로 여행을 갈 거라고 했어.

나와는 갈 수 없을 거라고 말했지. (왜?)

바다도 볼 수 있을 테니 마음이 들뜬다고 했어.

나와 못 가는 건 하나도 아쉬운 것 같지 않았어.

우린 만나도 별로 재미는 없었으니까 그럴만하다고 나도 생각했어.

그리고 스티디 그룹도 하기로 했다고 했어.

네 의견은 아니라고 덧붙였지.

그것도 나랑은 하지 않는 일이지.

너는 공부를 잘하니 굳이 스터디 그룹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겠지만

너의 친구들이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 걸 하자고 했겠지.

나는 조금 새침해졌지만

질투나 샘을 내진 않았어.

어차피 너랑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조금은 질투라던가 샘을 내주길 바라는 건가 하는 

생각을 조금 해 봤어.


그리고 너는. 머리를 잘랐는데 앞머리가 너무 짧아서 

하루에 머리를 두 번이나 감는다고 했어. 그런데 자라라는 앞머리는 안 자라고

뒷머리만 자란다고 했어. 

와! 너무 귀엽지 않니! 하루에 머리를 두 번이나 감는 여고생. (웃음)


그리고! 

1988년 7월 4일이 우리의 555일이 되는 날이라고 했어.

그게 어디서부터 온 셈인지 모르겠지만

너는 그렇게 카운트를 했어.

넌 종종 그런 숫자들을 편지에 적어 보냈지.

나는 그런 거에 의미를 두지 않아서

그저 너와 한 반이 되었던 그 해를 기준으로 너를 생각하지.


그래, 그런 편지였어.

그리고 나는 너에게 답장을 썼어. 30년도 더 지나. 쓰고 있어.

너와의 소중한 시간을 담은 나의 답장은 250페이지 정도 된단다.

더 늘어날지 그 쯤에서 마무리될지 아직은 모르겠어.

그중 절반은 네가 나에게 쓴 편지고

나머지는 나의 답장. 

그리고 고마운 친구들 몇의 편지들이야..

(네가 모르는 내 마음에 대해 

내 친구들의 편지에서 읽을 수 있을 거야.)

노안이 와서 판형이 크고 글씨가 좀 커. ^^;

아직은 편집과 교정을 많이 해야 하지만

일단 내 마음을 빨리 받아쓰기했어.

너에게 한 권. 나에게 한 권. 두 권을 만들어 둘게.

이 책을 네가 받게 된다면

이다음의 것도 있어. (무섭지? (웃음))

네가 읽고 나면 너의 답장도 받게 될까? 


30년이나 상자 안에서 깨끗이 버텨준 편지들이

갑자기 많이 낡아 보여. 만지기도 조심스러워.

물론 이번에 너의 편지를 사진으로 찍어두었으니까

마음껏 꺼내볼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이렇게 또 너의 편지를 찾으면

편집을 다시 해야 하긴 하지만

더욱 기쁠 따름이야.


네 말처럼 우리는 서로를 너무 그리워한 탓에...

서로에게서 멀어졌어.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시간은 많지 않아...

우리가 나이가 들었다는 말이야..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삶에서

우리를 다시 배워야 할 때가 아닐까?

너를 다시 복기하고 몹시 힘들었던 나를 생각하면

너의 삶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게

너에 대한 내 우정이 아닐까 고민했어.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시간은 많지 않고(계속 반복 ^^;)

나는 우리 우정의 해피 엔딩을 원해.

나에게도 너에게도 해피 엔딩을 선물해 주고 싶어.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난 그럴 수 있어.

너에게 주려고 확실한 걸 쥐고 있거든.

네가 내 손가락을 하나씩 펴면

내 손바닥에 쓰여 있을 거야. (웃음)

진짜야!!


너는 내가 보고 싶다고 했어, 항상.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었어, 항상.

우리의 우정, 무엇이었는지 내가 찾고 찾다가

묻고 묻고 묻어두었으나

우리의 우정은 나에게 잊히고 싶지 않다고 했어.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방관 속에서 희미해질 줄 알았는데

정말 소중한 건 세월을 이겨.

그건 나를 부수고 나를 꺼내놓지 않으면

숨조차 쉴 수 없게 했어.

그 시간들의 '의미'를 찾지 않으면 내 삶은 

무용하다는 걸 알게 됐어.

너 없이 나 혼자 시작했지만

너는 어디에나 있었고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었어.

어린 네가 나를 보지 않아도 나를 본다고 했던 걸

나도 하게 되었어.


너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뒤

며칠은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모를 너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냐.

그리고 곧 나의 어리석음을 뉘우쳤어.

내가 못난 게 많아도 여전히 그때의 나인 것처럼.

우리의 본질은 우리를 바꿔놓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어.

너는 용기 있고 진중한 사람이었어.

나는 여렸지만(미화해서 미안 ^^;) 강단이 있었지.

다만 우리는 어렸고, 세상을 좀 더 살아나가야 했던 거야. (웃음)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라고

네가 찾던 참모습의 너와 내가 찾던 본래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에게 답해주고 싶어.


삶은 진실하고 자연은 아름답지. 

그게 다라면 나는 너에게서 그걸 배웠고

나는 그 인사를 하고 싶어.

네 안의 빛나던 자부심, 그 마음에게 고맙다고.

너를 빛내던 그 빛이 나를 뒤덮어

그 마음 덕분에 기쁘고 따뜻했던 날 많았다고. 

오늘의 나는 그저 오늘의 나일 뿐이지만

그 '나'가 되는 것도 너무 안 쉬웠다고 푸념해보고 싶어.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어떤 나로 살게 되었을까?

좀 더 쉬운 삶을 살았을까 묻곤 해.

분명 너는 나에게 수많은 의문을 던져놓았고

나는 그걸  풀어낼 수 없다고 포기하던 중이었지.

그런 중에도

그 많은 혼돈과 무지와 모순들을 

버텨온 것은 모두 너와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우리에게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이 있었어.

당연히 그 후로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과의 더 많은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이 찾아왔겠지만

그때가 우리의 처음이었던 걸 우리는 알고 있어.

과거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야.

십 대의 우리에게 해피 엔딩을 선물하자는 거야. 

그때의 우리는 어렸고 지금의 우리는 어른이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는 그들의 부모인 셈이잖아.

그때의 너와 나에게 해주고 싶은 진심 어린 격려.

유머. 사랑스런 놀림. 귀여워해 주고 싶은 마음을.

우리가 실컷 전해주러 가자.

우정은 흐르는 강물처럼 영원한 거니까

(네가 적어준 시니까 기억해 내!)  

나의 바람을 넌 모른 척하지 않겠지?


하염없이 쓰게 되어 미안해.

매일매일 편히 자고 아침은 늘 기쁘길.


2024 01 17부터 2024 01 19  새벽 2시 25분에


지현이가


매거진의 이전글 너에게_너에게 배운 것들_너는 나의 선생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