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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씨 Feb 26. 2024

너에게_나의 편지를 찾으러 가줘_전시장 파란 우체통이야

2024 02 26 mon

너에게


너에게 나는 늘 부족한 기분이었어.

그래서 너를 잊으려고 했고 숨어버리고 싶었어.

네가 아는 내가 누군지 몰라서 무서웠거든. 

네가 아는 그 친구가 아닐까 봐 싫었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너에게는 내가 없어야 할 것 같았어.


그래서 우리에게 30년이 흘렀지.

33년인가? 넌 이런 거에 정확했으니까.

네가 잘 알겠지...


난 지금도 너에게 부끄러운 게 많아.

아니, 다 부끄러워.

나 자신. 나의 결정들. 나의 생각들. 나의 태도들.

그런데. 왜 만나자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어느 맑은 날, 여행 중이었어.

동행과 재밌게 놀다가 택시를 탔고 그곳 라디오를 들으며

숙소로 가고 있었지.

그 노래가 마룬 파이브의 메모리즈였어.

택시 안에서 함께 신나게 따라 부르다가 

네가 세상에 없을까 봐 더럭 겁이 났어. 

(그 노래 신나기만 한 노래가 아니잖아...)

그건 내가 상상도 못 한 일이었어.

때때로 널 힘들게 했을까 봐 잠 못 이룬 밤이 없지 않았어.

하지만 그랬다면 나에게 소식이 올 거라 믿었어.

너는 친구가 많았고 네 소식을 던지러 오던 네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날(너도 알지?) 이후 네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우연히라도 너를 보지도 못했어.


그렇게 지냈으면서 이제 나이가 많아지니까.

네가 세상에 없으면 어쩌지?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넌 어쩌지?

하는 벼락같은 가정에 몸이 두 조각나는 것 같았어.


그 가정 이후의 나, 그 나를 편지에 다 담긴 어려워.

너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몰랐어.

30년도 넘어 찾은 너의 외가댁에서는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속에 빠져버린 것 같았지.

마치 네가 과거의 미로 속에 나를 가둔 것 같았어.

하지만 거기서 나는 네가 편지에 쓴 모든 장소와 풍경과 햇살 아래서

십 대의 어리고 예쁘고 당당했던, 그 이상이었던 너를 다시금 만났어

하지만 그밖에 너에 대한 아무 단서도 얻을 수 없었어.


나는 우리 둘 사이에 누구도 있길 바라지 않아.

그래서 너를 아는 누군가를 찾아본다는 건 상상도 안 해.

물론 알지도 못하고. 

정말 그 부분처럼 백지 같은 부분이 있을까?


우리는 지나간 인연일까?

그래, 그건 지나간 감정이야.

그 감정을 다시 이어갈 생각이 아니야.

우리는 그런 바보들은 아니잖아.

나는 우리가 어른이 되었기에.

그리고 네가 엄마가 되었기에.

우리가 해내야 할 다음 과제가 있다고 생각해.

같이 해내고 싶어.

우리의 과거가 만든 우리의 미래를 

왼쪽과 오른쪽에서 이야기해보고 싶어.

웃고 울다가 장난치고 다정하게.


그다지 어른스러운 어른도 되지 못했고

그다지 멋진 프로필도 가지지 못했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그때의 빛나던 순수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을 거라 믿어.

그때는 알 수 없었던 인생의 과정을 경험해 냈으니까.


너와 이 과제를 해내고 싶어.

너를 만났고

너의 사랑을 받은 덕분에

너를 아주 많이 사랑했고

그래서 너라는 평생을 경험했고

그래서 내 인생이 꽉 찬 축복이었다는 말 전하고 싶어. 


물론 네가 나와 생각이 달라도 

부디 내가 너의 행복과 축복을 기도한다는 것을 잊지 마.


너무너무 고마웠고 고맙고 고마울 거야.

그리고 네가 그렇게 편지마다 썼던 말 나도 그래.

다시 한번 이 편지 아래에 써 보렴.

못하겠지? : )

그때 나는 네가 어려서 너의 마음을 확대했다고 생각했었어.

지금? 넌 변했어도 나는 그렇게 살아버렸어.

네가 주문처럼 그렇게 말한 덕분이겠지... : )

내가 그런 사람이라 좋아.

아버지에 대한 내 사랑처럼.

할머니에 대한 내 사랑처럼.

너에 대한 내 사랑을 가졌다는 것.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

고마워.


2024 02 26 월


지현


추신 ; 사랑해. (나는 웃으며 너에게 이 말을 전하는 거야. 바보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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