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명(呼名)

제17회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맥심상 수상작

by 일상 여행자


“이 집 며느리인갑제?”

본적 없는 낯선 여자의 정체를 묻는 동네 어르신의 물음에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않으셨다. 며느리가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애써 딸이라 정정하지도 않으셨다. 아버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물끄러미 서 있는 나를 어떤 다른 호칭으로도 명명하지 않고 침묵하셨다. 아버지의 묵묵부답이 덩어리가 되어 심장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저 딸인데요’ 인사하며 나섰을 나도 그냥 조용히 물러나 집안으로 들어왔다.


떠난 지 20년 만에 돌아온 본가였고, 음식점을 접고 내려와 파산 절차를 밟아가던 중이었다. 뜯어말리던 장사가 번창해 금의환향한 자랑스러운 자식이었다면 그렇게 조용히 외면받지 않았을까.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하고 지워진 존재로 각인된 그날의 기억은 가슴에 응어리진 채 자리 잡았다. 그 이후로도 손님 출입이 잦은 고향 집에서 갑작스레 돌아온 딸이 된 나는 오래전 떠나간 그대로 없는 듯이 조용히 지내야 했다. 누구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날 아버지의 침묵은 나의 처지를 정확하게 바로잡아주었다.

오기가 일어섰다. 투명한 이름이 된 내가 당당히 존재하기 위해서 무너진 몸과 마음부터 일으켜 세웠다. 새로운 객지가 된 고향에서 새길을 개척할 기운을 회복해야 했다. 상한 몰골로 누워 있는 자식 앞에서 한숨도 삼키는 집이 편치 않았다. 아침상을 물리고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나면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다시 돌아온 고향 경주의 변함없는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고도의 왕릉과 유적지 사이를 정처 없이 배회했다. 마흔여의 시간을 다져온 삶이 폐사지의 주춧돌처럼 쓸모를 잃고 떠돌았다. 서둘러 꺼져버린 청춘의 빛이 천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고분 앞에서 찰나처럼 느껴졌다. 억울할 것도 없는 잠깐의 나쁜 꿈인 듯했다. 세상 풍파에 순응하는 퇴색된 폐사지에서 마음의 생채기들도 버틸 재간 없이 아물어갔다.

더는 내려갈 데 없는 실패의 바닥을 치고 난 후의 나는 이전과는 달라져야 했다. 그동안 객지 생활에서 다진 맷집으로 처세에 대처하는 게 만만해졌고 인생의 중반에 접어든 나이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했다. 책임져야 할 처자 없이 홀로 넘어진 실패는 다행히도 홀가분했고, 20년을 전전하며 쌓아온 경험은 나아갈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 비싼 인생 수업료를 치르기는 했으나 마음을 고쳐먹으니 그저 감사한 것 천지였다. 몸이 회복되고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위축되었던 마음도 차츰 펴지기 시작했다. 빠진 구렁텅이에서 구사일생으로 올라온 성취가 자신감으로 쌓여 있었다. 한껏 주눅이 들어있던 목소리도 언젠가부터 기세등등해졌다.


오랜만에 친척 할아버지께서 들르신 날이었다. 무싯날 평일 대낮에 집에 있는 나를 보시고는 “니가 웬일이고?”라며 의아해하셨다. 자식 건사하고 살아야 할 과년한 딸이 늙은 부모 집에 얹혀살고 있는 모양새가 보시기에 편치 않으셨던가 보다. ‘나이가 차면 가정을 꾸려야지, 시집도 안 가고 부모 속이나 썩이고 있어서 되겠나’라는 골자의 일장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다소곳이 잠자코 있어도 시원찮은 ‘불효막심한 자식’의 비틀린 자존심이 막무가내로 끌끌하시는 앞에서 발동했다. 무슨 용기였는지 대뜸 “할아버지, 요즘은 저처럼 시집 장가 안 가고 혼자 사는 게 대세에요”라고 냉큼 받아쳐 버렸다. 곧바로 놀란 엄마의 야멸찬 손이 내 등짝을 후려치고, 예기치 못한 조카 손주의 당당함에 어안마저 황망해지신 할아버지는 누구를 나무라지도 못하고 애꿎은 시절 탓만 늘어놓다가 돌아서셨다.


그날을 기점으로 물러나기만 했던 뒷방 노인 같은 내 포지션을 반납했다. 상심을 늘어놓으시는 부모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더는 실패자의 낙인 아래에 붙박이고 싶지 않았다. 평소보다 한 술 더 얹은 명랑으로 의연함을 과시했다. 명절 차례나 제사 때도 음식만 차려내고 부엌으로 물러나는 대신 앞치마를 벗고 제에 참석했다. 남자 제관들 사이에서 예전에도 하지 않던 절을 하고 거리낌 없이 집안 어른들께 너스레를 떨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뜩잖아하는 부모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때로는 말리는 시누이 역할을 자처해 ‘요즘에는요’라고 시작하는 입바른 소리로 끼어들기도 했다. 그렇게 투명인간 대신 속없는 철딱서니를 자처했다. 고분고분한 숙맥이던 예전의 딸은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부모로서 바라지를 원껏 해주지 못한 자식이 아픈 손가락이 되듯 부모에게 못다 한 자식의 가슴에도 여한이 남았다. 언젠가 성공한 이후로 미뤄두었던 효도가 한순간 공중 분해되는 허탈감을 흠씬 맛본 나는 더는 후일을 기약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자잘한 서류 심부름과 스마트폰 작동법, TV 채널 검색처럼 낯설어하시는 신문물의 가이드가 되었으며, 잦아진 병원순례에 보호자로 동행했다. 노년기에 접어든 부모님이 내려놓으시는 소소한 일들을 도맡았다. 이전에는 없이도 잘 돌아가던 일들이 차츰 내 앞으로 속속 도착하고, 바깥일로 분주한 두 분을 대신하는 집안일의 범위는 동그라미처럼 퍼져갔다.

그러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집안 대소사와 논의에서 딸은 제외되기 일쑤였다. 경조사나 모임에는 당연히 끼지 않는 게 묵시적인 예의였고, 중요한 일들이 닥치면 아버지는 한 지붕 아래 사는 딸을 제쳐놓고 객지의 아들들과 상의하셨다. 애초에 번잡한 데는 가고 싶지 않을뿐더러 골치 아픈 일에는 나서고 싶지도 않은 터였다. 그러나 아우들을 통해 나중에서야 전해 듣게 되었을 때 남는 씁쓸한 뒷맛은 어쩔 수 없었다. 내 몫으로 돌아오는 의무나 책임은 자잘하게 늘어나는 데 반해 넘을 수 없는 선은 완고하게 제자리를 사수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맡고 있던 소임이라는 게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쉬운 정도인 주부의 가사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나름대로는 자부심으로 쌓아가고 있었던 내 얕은 가치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생각에 이를 때면 뒹구는 낙엽처럼 쓸쓸해졌다.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미숙한 처지라는 암묵적 무게에 짓눌려 은연중에 의기소침해졌고, 배려의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배제되는 소외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관계에 끼어드는 딸의 간섭이 불편해지면서 소소한 마찰과 부딪힘도 잦아졌다. 당사자가 되지 못하는 애매한 위치로 전락한 나는 한 발 뺀 무심함으로 방어했다.


“네가 무슨 보호자니? 집안일 좀 거두고 병원 모시고 다닌다고 보호자라 치면 세상 쉽게?” 사촌 언니는 경제적인 책임 하나 짊어지지 않고 자처하는 나의 보호자론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어이없어했다. 거기에다 부모님이 차려놓은 밥상에 달랑 숟가락 하나 얹고 사는 겨운 호강까지 일깨워주었다. 답답함을 하소연하러 갔다가 바라지도 않았던 ‘경제력도 갖추지 못한 혼자 여자’라는 자아 성찰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애쓴 마음이 무용지물 취급당하는 게 서운하긴 했지만, 고마움이 먼저였다. 염치도 모르는 철부지로 돌아서며 이가 없으면 대신하는 잇몸 같은 역할보다 보란 듯이 홀로서는 게 훨씬 시급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이로는 엄연히 어른이었으나 여전히 뭔가 충분치 않은 미성숙한 어른. 약방의 감초나 적재적소의 깍두기로는 요긴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외부인으로 밀려나는 여분의 덤 같은 존재. 무엇이 되지 못한 무명(無名)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천덕꾸러기이기도 했다. 가뿐한 홀로의 홀가분함으로 뭔들 못하겠냐는 부러움 한편으로 모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흥청망청 낭비하고 산다는 핀잔이 돌아오기도 했다. 혼자라고 해서 마냥 가벼울 만큼 인생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걸, 누리는 자유만큼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할 외로움의 무게가 있다는 걸 애써 변명하는 것도 구차했다.

온전히 독립하지 못한 혼자는 변신을 마무리하지 못한 중간체처럼 애매하게 존재했다. 결혼한 여자가 잃어버린다는 세 글자 이름처럼 내 이름이 호명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이상으로는 미세스이나 호적상으로는 미스인 나의 호칭은 아줌마와 아가씨를 넘나들며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당신들의 미해결 과제인 자식의 미혼을 당당하게 밝히지 않으시는 마당에 굳이 덧붙이기도 새삼스러웠다. 대신 단도직입적인 용건이 껄끄러운 상황들을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했다. 그렇게 나에 대한 호칭은 혼자만의 당당함만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이전처럼 오기를 부리거나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이것 또한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할 나의 선택이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고유하게 부르기 시작하셨다. 며느리처럼 애들 이름을 얹어 ‘누구 엄마’라고도 부를 수 없는 홀로인 딸. 예전 같으면 자식을 출가시킬 연배의 나이가 되어 이름을 부르기도 만만하지 않게 된 미혼인 딸(자식)의 이름. 철이 들고부터는 아빠에서 아버지로 고쳐 부르는, 당신에게는 유일한 딸에게 어울리는 호칭을 찾으신 듯하다. 아버지는 계급장 떼고 부르는 전우처럼 내 이름 끝자리를 친근하게 외치신다. 한때 유행하던 대중가수의 노래에서처럼 애절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게 들리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내 이름, 아버지만의 “희야”라는 부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