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가사 시리즈
1.
진가신 감독의 영화 <첨밀밀>(1996)은 유독 진한 풍경과 노래로 기억되는 영화다. 숨막히도록 아찔한 고밀도의 홍콩과 90년대 특유의 역동성이 살아 있는 뉴욕. 자전거를 타고 그 속을 가로지르는 여명과 장만옥의 움직임은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큼 아름다운 그림이다. 노래가 전달하는 울림은 더욱 크고 또렷하다. 등려군 혹은 테레사 텡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그녀의 노래 '첨밀밀' 이나 '월량대표아적심'은 알만큼 유명하고 그 곡조가 입혀진 멜로드라마는 몹시도 강렬한 정서적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오랜만에 영화 <첨밀밀>을 다시 꺼내보니 오랫동안 보관해 주었던, 한 밤에 청승떨기 딱 좋은 여러가지 추억들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인연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회상과 추억에 기인한 사건을 플롯의 주요 발견으로 사용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감상의 농도는 더욱 짙어진다.
촬영이 고되었는지 입가에 난 뾰루지가 눈에 들어오지만 여전히 클로즈 업의 아우라가 압도적인 장만옥과 그 시절 누구나 사랑했던 여명을 다시 보는 재미는 언제 봐도 새롭다. 개인적인 추억 속에서의 여명은 <첨밀밀>과 <유리의 성>으로 당대를 정평한 배우로(물론 출연작도 많고 가수로 더 유명하지만) 남아 있다. 90년대 말부터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당시 일본대중문화에 대해 닫혀 있었던 빗장이 풀려 몇몇 일본 영화가 개봉이 되면서 <러브레터>같은 작품을 보러 극장에 혼자 가는 등 중2병을 심화시키는 유년기 미적 트라우마의 홍수를 겪는 바람에 그 무렵의 외화, 특히 아시아권 영화에 대한 감상과 정서의 두서없는 총체가 뇌리에 강력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여명과 그의 출연작을 보며 받았던 충격 또한 그 총체적 덩어리 어딘가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고 때문에 그가 유독 90년대말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 같다.
'첨밀밀' 혹은 '월량대표아적심' 만큼이나 강렬했던 노래는 여명이 다시 부른 'Try to remember'이다. 사실 원래 이 노래는 The Brother's Four가 부른 올드 포크 팝송인데 여명이 <유리의 성>의 OST로 다시 불러서 그 맘때 국내 라디오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여명의 목소리도 참 좋고, <첨밀밀> 만큼이나 혼란스러운 당대 홍콩의 상황과 겹겹이 쌓인 시간 속을 파고드는 정통 멜로 드라마 였던 작품의 맥락과 섞여 정서적 울림이 몹시 큰 멜로디로 남아 있다. 몇 마디 짧은 가락이나 배우의 음성, 혹은 짧게 스쳐지나가는 풍경 하나 만으로도 기억의 마당이 우주만큼 무한하게 펼쳐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글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첨밀밀> 하나로 인해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아름다운 시절속에 파묻혀서는 어쩔 수 없이 감상의 바다를 헤엄친다. 작품이 주는 정서적 각인이라는 게 이처럼 영원에 가깝고 또한 무서운 흔적인 것 같다.
2.
이제 기억은 <유리의 성>을 타고 한국 대중가요로 넘어 온다.(기억의 우주를 떠돌던 상념이란 이처럼 요상한 맥락을 통해 시공간을 찢어내야 제 맛이다.)
90년대 말 대중가요를 좀 들었다 하는 사람에게 '유리의 성'은 K2 김성면으로 귀결된다. 남중 남고를 나온 입장에서 추억해보면 남자들에게 유독 인기 많고 자주 불리는 노래들이 있다. 버즈의 노래(겁쟁이같은 노래도 좋지만 정수는 Monologue나 가시)들이 그렇고 포지션의 노래(너에게, 특히 뒷부분의 고음을 소화하느냐 마느냐가 시대의 문제)가 그랬던 것 같다. 플라워는 한 때 대통령이었고(Endless, 눈물, Good bye, For you 등) 에메랄드 캐슬의 발걸음은 모르면 간첩인 수준이다. K2도 그 가운데 한 축을 구성한다. 하지만 K2는 어딘지 모르게 주류에서 살짝 벗어난 느낌이 있다. 정파 보다는 사파의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가시' 같은 노래는 누구나 한 번쯤 시도해 보지만 '슬프도록 아름다운'이나 '그녀의 연인에게'는 약간 다른 포지션 상에 있는 기분이 든다(심지어 '소유하지 않은 사랑'이나 '시간을 거슬러' 같은 경우는 스테디셀러 축에도 끼기 어려웠다). 아무튼 내가 살아온 삶의 영역에서는 그러했다. 아마도 이것은 김성면 특유의 보이스컬러와 전체적으로 높은 음계가 당시 남중-남고의 핵심을 뚫기에는 미묘하게 어려운 지점을 만들어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왜 에메랄드 캐슬의 '발걸음'은 이지리스닝 느낌이고 '슬프도록 아름다운'은 이지리스닝하지 못하다는 인상인가에 대해서는 누가 논문이라도 써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K2와 관련하여 취향 대통합을 이룬 것은 뭐니뭐니해도 '유리의 성'이다. 동네마다 현상이 달랐을지는 몰라도 내 삶의 영역에서는 단언할 수 있다. '유리의 성'에 대한 판단 만큼은 이견이 없다. 노래방을 좋아했던 많은 남성들의 정서 속에서 이 노래는 어쨌든 마스터피스다.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후렴 부분의 '다시 만날 거야.'인데 이 부분을 소화하느냐 아니냐가 간지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기억하기로 이 지점의 최고 고음인 '다' 지점이 3옥타브 도(C5)인데, 이 하이C를 내느냐 마느냐, 내더라도 멋없게 내느냐, 발성이 안 좋아도 듣기에 간지나게 지르느냐, 하는 것들이 상당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물론 당시 나를 비롯한 주변 평범한 남고생 녀석들의 경우 2옥타브 라에서 좌절감을 맛보는게 보통이었으므로(그래서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의 후렴을 소화하느냐가 기준이다.) '유리의 성'을 제대로 완창한다는 것은 진정성 있는 간지를 담보하는 행위일 수 밖에 없었다.
3.
고백하자면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노래를 곧잘했다. 중학교 때는 '매기의 추억' 가창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 중창단 제의를 받은 바 있고, 고등학교 때는 '노들 강변' 가창 시험에서 100점을, '오 솔레 미오' 가장 시험에서 너무 멋을 부린다는(바이브레이션에 집중하다가) 쓴소리와 함께 98점을 받은 이력이 있다.(지금은 목이 망가져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한다.)
1학년 때, 당시 교생 분들이 오셔서 실습하는 기간이었는데, 마무리 하는 주차가 되면 보통 수다도 좀 떨고 한 시간 정도는 놀면서 실습을 마무리하는 루틴이 있었다. 그럴 때 꼭 이 반에서 노래 좀 하는 애 있으면 나와서 한 곡 불러봐라 하며 놀자판이 깔리는 경우가 있었고, 딱 한 번 친구 추천을 받아 노래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두 명이 앞에 나가서 노래 했는데 내 앞에서 먼저 노래한 친구가 최용준의 '갈채'를 불렀고 내가 지영선의 '소원'을 남자키로 불렀다. 알량한 실력이었지만 어쨌든 당시 교생 선생님(물론 선생님은 시류를 읽지 못하시고 '건즈 앤 로지스'의 노멤버레인 부를 줄 아는 사람은 없냐고 묻긴 하셨지만)의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정도는 어쨌든 노래방 안 개구리에 불과한 수준이었고, 보컬리스트로 학교 전체에서 제법 유명한 친구가 따로 있었다. 이 친구는 내 기억에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운 친구였나 그랬는데 톤이 높아서 스트라이퍼(그 놈의 투 헬 위드 더 데블)의 노래를 소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완전히 다른 반이고 친분이 없었던 나도 그 친구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을 만큼 실력으로 알아주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의 실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수련회 장기자랑 때였다.
4.
당시 남고 수련회 장기자랑은 뭐 알 만한 분위기라 아기자기한 맛은 없고 누군가 나와서 멋있는 밴드 노래 한 소절 잘 부르면 그만인 자리였다. 그 때 그 노래 잘한다는 친구가 나가서 자신있게 마이크를 잡았다. 선곡은 Y2K의 'Bad'. 그런데 이게 웬 걸 시작은 순조로웠으나 뒷부분 고음으로 갈 수록 소리가 막히고 심지어 가사를 놓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무대에서 절대 보여주면 안되는 애티튜드, 그러니까 '제가 지금 목감기에 걸려 상태가 안 좋아서 ~ 이러쿵 저러쿵'을 시전하고 말았다. 보컬리스트의 무대를 기대했던 아이들의 분위기는 결국 차게 식고 말았다. 감동 없는 무대가 끝나고 강당에 모인 아이들의 자세가 시큰둥해질 무렵. 4반의 어떤 학생 하나가 떠는 기색도 없이 무대에 올라왔다.
전형적으로 공부에 관심 없어 보이는 스타일링을 한 학생이었다. 내가 살던 영역에서 이 스타일링이라 하면 이제 우선적으로 바지통을 확 줄여야 한다. 종아리와 허벅지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바지를 밀착시킨 착장에 이제 헤어는 젤을 사용하여(왁스 보다는 젤이어야 맛이다) 앞머리를 옆으로 잘 빗어넘겨야 한다. 당구에서 쓰는 일본어 표현인데 우리는 그 때 앞머리에 시네루를 준다고 했다. 아무튼 그런 포인트들이 잘 살아 있는 가운데 반항적인 눈빛이 있으면 좋다. 노래를 하겠다고 올라온 그 4반의 친구가 명확하게도 그런 룩을 뽐내고 있었다. 당돌한 학창생활을 보내고 있으리라는 것을 보기만 해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는 당시 1학년 학생 중 몇 안되는 복학생이었다. 1년을 꿇었다는 소리다. 1학년 중에 '학년을 꿇은 형'이 세 명이 채 안되었기 때문에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바로 그 1년 꿇은 형. 그야말로 무서운 존재였다.(일단 꿇었다 하면 무서운 형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착장과 행색도 이해가 갔다. 내막은 몰라도 뭔가 드라마틱하고 대찬 10대 시절을 보내고 있는 중이리라. 어떠한 질풍노도의 순간을 겪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코 순탄하지 않은 학창생활을 겪어내고 있을 것이 명약관화였다. 그런 4반의 '1년 꿇은 형'이 노래하러 올라와서 무표정하게 마이크를 잡자 간주가 흘러나오는데 그 노래가 K2의 '유리의 성'이었다.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 사람은 떨지도 않고 눈 감은 채 노래를 시작했다. '모두 지난 일인데, 이미 넌 내곁에 없는데...' 하는데 미성이었다. 나와 친구들의 집중도가 최고조에 달했다. 멜로디가 상승하고 강약이 크레센도로 진행되다가 드디어 후렴이 시작되었다. 저 유명한 '다시 만날 거야-'가 울려퍼지는데 그야말로 완벽한 음정에 청아한 보컬의 아름다운 공명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어느 정도로 잘 불렀냐면 '다시 만날 거야-' 후렴 첫 소절 딱 부르는데 시커먼 남고생들로 가득한 그 강당에서 너 나 할 것 없는 '우-와-' 소리가 퍼져나갔을 정도다. 그건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리액션 중 하나였다. 그 다음부터는 모두가 홀린 듯 그의 노래에 빠져 들었다. 2절 이후 후렴이 반복되는 지점에서도 음정이나 호흡의 흔들림이 하나 없었다. 나중에 들었던 이야기에 따르면 음악을 하기 위해 1년을 꿇었다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지금도 음악 관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아무튼 정확히 그 날 그 순간 만큼은 머리를 반항스럽게 빗겨넘긴 그 복학생 형이 우리의 로버트 플랜트이고 롭 헬포드였다.
그 시절, 그 자리를 함께한 모두들에게 '유리의 성'은 유사한 형태의 감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같은 학년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고 보컬리스트로 소문나지도 않았지만 그 날 밤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줬던 그사람의 목소리, 그 느낌 그대로.
5.
'유리의 성'을 따라 홍콩에서부터 나의 고등학교까지 흘러왔다. 개인의 상념이 살아숨쉬는 공간은 역시 바다 보다 깊고 우주 보다 넓다. 오랜만에 잠 못 이루고 청승 떨다가 노래를 듣기 위해 유튜브에 접속하니, 댓글에 각자의 사연을 지닌 개인들의 우주가 거의 무슨 은하수처럼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이 노래를 좋아했던, 먼저 세상을 떠난 동생을 추억하며 이제 형이 결혼한다고 쓰고 있다.
다른 이는 이 노래를 함께 들었던, 지금은 곁에 없는 어머니를 추억하며 노래를 듣고 있다고 적어 놓았다.
이런 글들을 보다보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우주들의 형태가 얼마나 복잡다단할지, 그 상상만으로도 압도되어 이상한 기분이 되곤 한다.
누군가는 이런 댓글을 달아놓았다.
"95년 군입대하고 이등병때 두렵고 낯설었던 최전방 GOP에 자대배치받고 야간에 철책선에서 들었던 첫노래 'K2 슬프도록 아름다운' 지금도 이 노래 듣고있자면 철책선에 온갖 기억들이 떠오른다.(유튜브 홍XX님의 댓글)
그러니까 이 분은 내가 '유리의 성'을 타고 고등학교 시절의 어떤 영역을 다녀온 것처럼 젊은 시절 최전방의 어떤 풍경을 만나고 오신 것이다. 역시 인간의 마음 속에는 그 자신에게 가장 넓은 우주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우주들에 방문하는 것이 흥미롭고, 수많은 우주들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 또한 즐겁다. K2의 선율을 타고 펼쳐지는 홍XX님의 95년의 기억은 어떤 모습일까. 그 우주 속에 자리한 군 시절 속에 어떤 사건과 감정들의 총체가 있을까.
영화 <첨밀밀>의 선율이 그러하듯 '유리의 성'이라는 노래 한 곡이, 혹은 K2처럼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가수의 어떤 노래 하나가 가지고 있는 힘이 이토록 대단하다. 그것이 대중음악이든 영화든 다른 형태의 예술이든, 그 힘은 어떤 개인에게 영원에 가깝고 또한 무서운 것이며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한 때는 매기의 추억으로 만점을 받았던 가창자가, 이제는 2옥타브 라는 커녕 솔도 파도 힘들어진 사람이 되었지만, 한 번쯤은 노래방에 가서 제멋대로 '유리의 성' 불러 제껴볼까 하는 욕심을 가져본다.
모두 지난 일인데
이미 넌 내 곁에 없는데
이젠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별은 시간이 흘러가도
추억보단 아픔으로 그렇게 남나봐
유리로 집을 지어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우리 영원히 함께 하자던 너의 꿈
깨어져버린 유리 조각되어
내 가슴에 흩어져 내리네
추억은 아주 잠시 나를 위로할 뿐
우리 이별뒤로 사라져가고
하지만 내가 믿고 싶은 건 단 하나
이 세상이 끝나면
다시 만날꺼야 저 하늘 위에서
그토록 바라던 유리의 성을 지어서
그때는 너의 손 놓지 않을게
마음껏 울어도 돼
너의 눈물 닦아 줄테니
추억은 아주 잠시 나를 위로할 뿐
우리 이별뒤로 사라져가고
하지만 내가 믿고 싶은 건 단 하나
이 세상이 끝나면
다시 만날꺼야 저 하늘 위에서
그토록 바라던 유리의 성을 지어서
널 지켜줄꺼야 니 맘에 상처가
아무는 날까지 우린 영원히 함께해
그때는 너의 손 놓지 않을게
마음껏 울어도 돼
너의 눈물 닦아 줄테니
마음껏 울어도 돼
너의 눈물 닦아 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