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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Feb 27. 2023

동시대 바브린카와 머레이에 대하여

시시콜콜한 이야기

1.

테니스 경기 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테니스 동호인 이셨고 집 안에 라켓과 공, 각종 테니스 관련 물품이 많았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테니스 코리아를 잠시 구독하셨는데 그 때 그 잡지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어떤 미국 선수의 이름이 안드레 아가시 였는데, 어린 마음에 남자 선수가 이름이 아가씨? 하며 사진을 보니 또 머리카락이 길어서 매우 혼란스러워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잡지 맨 뒤쪽에는 ATP/WTA 투어 현황과 세계랭킹이 나와 있었는데 남자 1등은 맨날 Sampras, Pete이고 여자 1등은 항상 Graf, Steffi였다. 순위가 변동하는게 흥미진진해서 선수들의 이름을 외우고 그랜드슬램 경기를 보는 게 유년의 취미 중 하나가 되었다. 

(옛날 미국 오디션 프로그램인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2에 클레이 에이킨(최종 준우승자)이 나와서 The Foundations의 'Build Me Up Buttercup'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 때 심사를 했던 닐 다이아몬드가 '안드레 아가시가 테니스 치는 것처럼 노래를 부른다.(You sing like Andre Agassi plays tennis.)'라고 평한 적이 있다. 이는 테니스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꽤나 황홀하게 들리는 공감각적 비유였고, 나중에 글을 쓸 때 '로저 페데러가 백핸드를 치는 것처럼' 따위의 직유문장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테니스와 그 플레이어에 대한 관심은 전방위적으로 뻗어나가 각종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2.

중학교 다닐 때였나. 그 때부터 새벽을 좋아했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앞두고 밤새 공부하는 버릇이 시작되었다. 당시 1학기 기말고사 무렵이 테니스 그랜드슬램 대회 중 가장 권위있는 윔블던 시합 기간이었다. 잠이 솔솔 오고 과도한 스트레스로 코르티솔 수치가 살살 높아지는 새벽 2시쯤 되면 종종 윔블던 경기를 시청했다. 한국의 새벽은 윔블던의 오후였고 중요한 경기는 케이블 채널에서 중계를 해주기도 했으므로 잠시 머리를 식힐 겸 한 게임을 보다가 공부를 하다가 했던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반지하 빌라에 살던 시절 평상을 펴놓고 공부를 하다가 보았던 미라냐 루치치(크로아티아)의 1999년 윔블던 여자 단식 경기들이다. 당시 17세의 미라냐 루치치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전설적인 선수이자 당시 4번 시드였던 모니카 셀레스를 3회전에서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내가 모니카 셀레스를 좋아할 이유는 많았는데 악에 받친 특유의 함성도 그러했고(현재 아리나 사바렌카를 응원하는 이유 중 하나) 공격적인 스트로크는 물론 포핸드와 백핸드를 모두 투 핸드로 치는 별난 패턴 때문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코트에서의 안타까운 사고로 커리어의 정점에서 휴식을 취해야만 했던 그 불운이 그녀를 더욱 격려하고 애정을 쏟고 싶게 만들었다. 나는 챔피언을 좋아하지만 재미가 없는 테니스는 좋아하지 않는다. 슈테피 그라프는 역사상 최고의 포핸드를 치는 선수였고 그랜드슬램 타이틀이나 연속 세계랭킹 기록에서 최근까지도 최고 기록 보유자 였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지만(물론 역사에 가정법은 없으나 모니카 셀레스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라프가 그러한 기록을 달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91~93년 사이 그랜드슬램 기록과 추이를 보면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백핸드는 무조건 강한 슬라이스로 일관하고 포핸드 기회를 노리는 플레이 패턴은 솔직히 단조롭게 느껴지는 면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상대 선수들은 언제나 백핸드를 공략하고 그러다 보면 랠리가 길어지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스타일이 좀 다르긴 하지만 유사한 상황이 동시대 이가 시비옹테크의 일부 경기에서 재현되고 있다!)


물론 아버지는 슈테피 그라프의 백핸드 슬라이스는 세계 최고의 슬라이스라며 포핸드 못지 않은 백핸드 전략이 있어서 최강의 선수라고 칭하셨지만 나는 그런 그라프를 두고 백핸드 포핸드 가리지 않고 찬스만 나면 구석으로 강한 공을 꽂아넣는 모니카 셀레스의 담대한 플레이가 좋았다. 기술도 다양하고 양 방향 투핸드 전법이라 기동력이 좋지 않은 느낌이 있지만 잘 보면 풋워크도 기가 막혔다.(이런 희열은 동시대 대만 선수 셰쑤웨이의 경기에서 종종 느낄 때가 있다!)


아무튼 이러한 모니카 셀레스를 3회전에서 꺾은 게 17살의 어린 선수 루치치 였다. 그러니 지금 억지로 암기해야 할 윤리 교과서 따위가 눈에 들어오겠느냐 말이다. 루치치 선수는 그 해 심지어 준결승, 세미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녀가 4강에서 만난 상대는 슈테피 그라프. 나는 그 경기를 봐야했다. 이 열 일곱의 신예는 그라프 앞에서도 당당했다. 심지어 1세트를 승리로 가져왔고, 그라프의 포핸드에도 맞서 싸울 수 있는 힘과 재능이 있었다. 정말 교과서를 펴놓고 한 문단 읽고 나면 한 게임을 보고, 또 한 줄 외우면 한 게임을 보면서 새벽을 지샜다. 나의 전두엽은 그야말로 대혼란의 교착 상태에 빠졌다.

루치치가 결승에 올라갈 줄 알았지만, 끝내 그라프의 관록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참으로 아쉬웠다. 물론 그 해 윔블던의 여자 단식 우승자는 린지 데븐포트 였지만, 그래도 루키 선수가 역대 최강의 챔피언을 꺾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루치치가 경기에서 지고 나니 피곤과 통증이 여기저기 몰려왔다. 그 후 10분 정도 지났을 까 교과서는 무슨 에이 잠이나 자자 하고 매트리스에 누워 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테니스는 이처럼 내 생활 곳곳에 전방위 적으로 뻗어나가 각종 감각과 정신상태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참, 그 때의 그 미라냐 루치치 선수가 인생의 곡절을 겪고 십 수년만에 복귀하여 2017년 호주오픈 4강에 올랐던 것을 기억하는가? 1999년 그녀의 경기를 본 뒤 아쉬움에 에이 잠이나 자자 했다가 영 재미없는 윤리 시험 성적을 받아든 그 때 그 소년이 정말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3.

2000년대 이후 남자 테니스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로저 페데러, 라파엘 나달, 노박 조코비치. 끝이다.


앤디 로딕, 마라트 사핀, 레이튼 휴이트 ... 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보통 이 시점 쯤 되면 그렇게 말하는 경우는 잘 없다. 빅3. 로저 페데러, 라파엘 나달, 노박 조코비치. 끝이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앤디 로딕과 마디 피쉬가 나온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그들이 이 세 사람의 등장 앞에서 느낀 절망감과 부담감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들은 정말 벽과 같은 존재들이다. 마디 피쉬에 따르면 페데러는 어떤 경우에도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찾아내는 선수라고 했다. 사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는 황제라는 칭호를 얻은 선수다. 클레이코트에서는 나달을 뛰어넘을 만한 선수가 또 나올까 싶고, 조코비치는 각종 기록상 GOAT다.


이제 문제는 그 틈을 파고들어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고 끝내 이름을 새긴 선수들, 그 중에서도 스탄 바브린카와 앤디 머레이를 지켜보는데 있다. 사실 이 글을 끄적이게 된 것도 최근의 이 두 선수의 경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글 제목을 바브린카와 머레이라고 해놓고 워낙 ADHD식 가지치기 형식의 글을 쓰다보니 챕터 3이 되서야 두 사람을 언급한다. 


빅3의 등장이후 그랜드 슬램 대회에서 저 세 사람이 우승하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자, 페데러의 그랜드 슬램 우승은 2003년부터지만 나달이 그랜드 슬램에서 우승한 2005년 프랑스 오픈을 기준으로 살펴보자. 이 때부터 2023년 현재까지 그랜드 슬램에서 세 사람이 우승하지 않은 경우는 열 한 번 뿐이다. 코로나 사태로 윔블던이 열리지 않았던 2020년을 제외하면 그랜드 슬램 결승은 총 71번 열렸다. 남은 60번의 우승은 페데러, 나달, 조코비치가 나눠 가졌다는 뜻이다. 그 열 한번의 '이변'을 연출한 사람들 가운데 후안 마틴 델 포트로, 마린 칠리치가 있고 이들은 US 오픈에서 한 번씩은 페데러를 꺾고 우승했다. 사람들은 특히 페데러의 대회 6연패를 저지한 델 포트로가 엄청난 선수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의 커리어는 생각만큼 뻗어나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사이사이 가장 눈에 띄는 인물들이 누구인가!? 살펴본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스탄 바브린카와 앤디 머레이다. 바브린카는 정말 센세이션이었다. 지금도 바브린카가 2014년 호주오픈 우승할 때가 생각난다. 다크호스 였지만 조코비치와 나달을 모두 꺾고 생애 첫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차지할 것이라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의 8강 경기는 5세트 접전이었는데 땀을 있는 대로 흘리며 백핸드 위너를 만들어낸 바브린카의 모습은 테니스 팬이라면 누구나 반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의 플레이는 그야말로 힘과 땀이 절실하게 느껴져서 열기가 화면을 뚫고 전달될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구석으로 오는 공을 뛰어가서 원핸드 백핸드 다운 더 라인을 성공시키는 그 모습에서 희열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무것에도 감동할 수 없는 인간일 것이다. 그가 더욱 대단한 것은 호주오픈에서의 우승 이후 원 슬램 원더 커리어로 끝나지 않고 프랑스 오픈, US오픈을 한 차례씩 더 거머쥐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도 물론 페데러(2015 프랑스 오픈 8강)와 조코비치(2015 프랑스 오픈/2016 US오픈 결승)를 상대로 승리하며 일궈낸 성과였다. 그 보다 더 감동인 것이 뭔지 아는가. 2023년 현재 그가 여전히 현역으로 투어를, 그것도 매우 열심히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는 나이도 많이 먹었고(1985년 생으로 37세다.) 세계 랭킹도 100위 언저리(2023년 2월 20일, 105위)에 있지만, 그래도 뛴다. 그가 최근 프랑스에서 열린 ATP 투어 OPEN 13대회 1회전에서 14살 차이가 나는 99년생 무명의 독일 선수 Zizou Bergs와 맞붙었는데 3세트 까지 가는 그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보면서 어쩐지 울컥 하는 게 있었다. 이제는 투어를 뛰면 250 대회에서도 곧잘 1회전 탈락하는 바브린카지만 그 어린 선수를 상대로 뛰고 또 뛰고 전매특허 원 핸드 백핸드로 다운 더 라인을 성공시키는 그 모습이, 그토록 땀을 흘리는 그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감동이었던 것이다. 이기기 위해 뛰고 또 뛰던 그는 2세트를 타이브레이크 끝에 내주었지만 3세트를 다시 가져와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그런데 2회전 상대가 누구였는지 아는가? 또 하나의 원 핸드 백핸드 장인, 프랑스의 리샤드 가스케 였다. 그랜드 슬램 우승 경험은 없지만 가스케를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86년 생, 36살로 바브린카와 동년배인 그는 16번의 투어 우승기록이 있고 정말 눈물 나는 게 올해(!) 1월에 열린 오클랜드 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이 나이에 투어 타이틀을 하나 더 쌓은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이제 몇 없는(그러니까 디미트로프 정도?) 파워 넘치는 원 핸드 백핸드를 구사하는 두 베테랑이 ATP투어 2회전에서 만나는 모습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겠느냐 말이다. 바브린카의 1회전 하이라이트도 대단했지만 가스케와 만난 2회전을 보면서 아무래도 나는 이런 글을 한 번쯤 끄적여 봐야겠다 생각한 것 같다. 결국 이 2회전도 3세트 까지 가는 접근 끝에 바브린카가 승리해서 8강에 진출했다. 마침 대회 우승후보 야닉 시너가 기권을 하는 바람에, 어? 바브린카 결승 한 번 가나? 라는 기대가 듬뿍 차오르기도 하였는데 -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대회가 참으로 보기 좋고 황홀했다는 말은 남기고 싶다. 그래, 그게 바브린카고 이런 게 테니스의 재미인 것 같다. 때로는 파워 넘치는 모습으로, 때로는 한없이 에러를 남발하며 무너지는 모습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정상에 섰다가 내려갔다가. 하지만 아직까지 멈추지 않는 패기로 투어를 감당해 내는 저 능력. 이런 것들을 상대할 때의 감동은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색면 추상을 목도 했을 때의 그것과 유사한 종류의 전율을 불러일으킨다.(이렇게 쓰면 좀 더 그럴싸한 공감각적 비유문장이 되지 않을까 싶었으나 그 보다는 수준 얕은 허세로 보이는 듯 하다...)




4.

앤디 머레이(혹은 머뤼)는 또 어떤가.

윔블던에서 영국 남자 선수로 결승에 간다고 했을 때 얼마나 압박과 부담을 느낄지 상상이 가는가? 위에서 언급한 마디 피쉬의 다큐멘터리를 보라! 미국 선수로 US오픈 8강만 가도 스트레스 때문에 심박수가 200을 상회할 정도 였다는데, 하물며 1936년 프레드 페리 이후 기나긴 시간 동안 온 영국 국민들이 간절히 원했던 영국인 우승자의 타이틀을 코 앞에 놓고 있는 자에게 던져질 중압감이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에 비견된다고 하면 과장일까? 


그런 부담을 모두 안고 경기에 나가 윔블던 2회 우승과 US오픈 1회 우승을 일궈낸, 한 때 빅3 사이에 이름을 올려 빅4로 불리기도 했던 것이 앤디 머레이다. 그의 나이도 이제는 35세(1987년생). 부상도 많았고 노쇠의 기로에 접어든 왕년의 선수가 되었지만, 그도 바브린카 처럼 투어를 뛴다. 열심히 뛴다. 세계랭킹은 70위(2023년 2월 13일)로 내려갔지만 그래도 정교한 백핸드 스트로크와 지칠 줄 모르고 움직이는 다리로 동시대 상위 랭커들을 상대하고 있다. 특히 최근 도하에서 열린 카타르 오픈을 보았는가? 머레이에 대해 뭔가 글을 남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바로 이 대회 때문이다.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머레이는 여기에서 준우승을 했다! 사실 머레이가 얼마나 전설적인 선수냐면 투어 타이틀이 무려 46개나 있고 2016년만 해도 그 해 타이틀 9개, 결승진출 13회로 Player of the Year로 선정되었을 정도였다. 그랬다가 이제 수술 등으로 코트를 떠났고 이제 은퇴하나보다 라고 모두가 생각했을 때, 다시 돌아온 다음 착실하게 투어를 뛰며 2023년 현재까지, 정말 각본을 쓰라고 해도 그렇게 쓸 수 없는 드라마 같은 경기를 펼쳐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카타르 오픈은 정말 결정적이었다. 여기에서 앤디 머레이는 레헤치카 와의 4강 경기에서 무려 다섯개의 매치포인트를 세이브 했다. 5MP Saved. 믿겨지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스포츠에 열광하고 있고 또 열광해야 하는지 몸소 증명하고 있는 게 다름아닌 앤디 머레이다. 더 대단한 것을 얘기하자면 2023년 들어 앤디 머레이는 이미 베레티니, 소네고 와의 경기에서 총 4개의 매치포인트를 세이브 했고, 호주오픈에서는 홈코트의 이점을 자랑하는 코키나키스에게 2세트를 먼저 내준 뒤 내리 3세트를 이겨 승리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번 카타르 오픈에서 일부러 하라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한 승부를 보여준 머레이는 결국 결승까지 진출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감동적이지 않은가.


결국 2005년 이후 남자 단식 테니스 그랜드슬램에서 빅3를 제외하고 남은 이름들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두 명의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가 있다면 바브린카와 머레이가 되고 말 것이다. 이쯤 되면 식상한 표현일 수 있지만 동시대 그들의 경기를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투어 1, 2회전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좀처럼 세계랭킹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카타르 오픈이나 Open 13 대회에서와 같은 전율을 팬들에게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5.

이제 미래는 무서운 신예들의 몫이다.

한 때 빅3를 위협했던 팀(특히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기대하고 있는), 치치파스, 즈베레프, 메드베데프(US오픈 우승 등으로 순항하고 있는 편이지만) 등이 잠시 주춤한 가운데, 뭔가 아! 진국이다 싶은 느낌의 10대 소년 까를로스 알카라스의 등장이 무척이나 반갑다. 단지 이른 나이에 세계랭킹 1등과 그랜드슬램 우승을 달성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나 한 번 보면 알겠지만 그의 테니스에는 (재능은 물론이고) 투지가 있다. 사람들이 끈기와 투지로 직조되어 아름답게 기억되는 랠리를 보고 싶어한다고 했을 때 그런 감동 서사의 테니스를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은 현재 알카라스에게 있다.


부상으로 호주오픈 시즌을 잠시 쉰 뒤, 남미 투어를 돌며 우승 1회(아르헨티나 오픈), 준우승 1회(리오 오픈 - 올해 들어 투어 결승전에 두 번이나 진출했지만 매번 준우승을 했던 카메로 노리가 드디어 우승한 대회)를 기록한 2003년생의 이 선수는 정말 테니스 만화의 주인공이 현실에 나타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아름답고 청량한 구석이 있다.


휴지기를 가진 뒤 복귀한 알카라스가 전과 달리 수염을 깎지 않고 경기에 나서는 것 알고 있는가? 구레나룻부터 하관까지 제법 빽빽하게 뒤덮은 그 수염에는 어딘지 모르게 십대 소년 선수의 성장과 변화를 테마로 한 서사를 부여하고 싶게 만드는 데가 있다. 그런데 또 그가 이번 시즌 들어 유독 튀는 핫핑크 컬러의 나이키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가?(남자라면 핫핑크지) 알카라스는 모든 매력적인 요소가 정말이지 경황없이 충돌하는, 그야말로 악마의 스타성을 가진 선수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이 시점에서 테니스의 매력을 증폭시키는 - 알카라스 같은 영건들에게 바라는 것은 샘프라스 처럼, 페데러/나달/조코비치처럼, 혹은 그라프나 세레나 처럼 오랜 시간 왕으로 군림해달라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영광을 누리면 좋겠지만 그 보다 '재미있는' 테니스, 화려하게 빛나지 않더라도 '감동을 주는' 테니스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먼저인 것이다. 같은 드라마가 아니라 새롭게 이어지는 드라마를, 예상했던 것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경험 같은, 일종의 전율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대 바브린카와 머레이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대문사진 출처 : https://rioopen.com/en/2023/02/alcaraz-survives-scare-against-jarry-and-reaches-second-rio-open-final-in-a-row/ , 저작권 FOTOJ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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