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이야기
1.
이것은 아버지가 운전하는 르망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를 향하던 기억으로 시작한다.
당시 조수석에는 사촌 형이 타고 있었고, 뒷좌석에는 나와 누나 그리고 엄마가 있었다.
아마 그 날의 행선지는 산정호수 아니면 서울랜드 처럼 간단히 놀기 좋은 유원지 어느 곳이었을 것이다.
1996년 아니면 97년. 그 때 사촌형과 누나, 그리고 나는 모두 어린 10대들이었다.
코트를 입어야 하는 추운 겨울 날씨 였던 것 같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내내 10대들은 조잘조잘 쉴 틈도 없이 떠들어댔다.
차 안의 분위기는 몹시 들떠 있었는데, 그 때 우리는 H.O.T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아이돌 H.O.T말이다.
캔디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대중가요 문화는 초등학생 이었던 나와 누나의 삶 속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사실 그 전부터 우리가 성인가요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나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의 랩을 외우는 정도까지는 되었다만 H.O.T의 영향력은 혁명 수준이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1집 <캔디>가 있었다.
내 기억에 누나는 장우혁을 좋아했었고 나는 토니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이 때 VIEW나 파스텔, 뮤직라이프 같은 잡지를 사기 위해 동네 서점에 처음 가봤으며
<캔디>의 무대 소품이었던 장갑과 가방을 샀던 기억도 있다.
유원지를 향하던 아버지의 르망 차 안에서 우리는 H.O.T 1집 테이프를 카오디오에 넣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신나게 따라불렀다. A면을 다 듣고 이제 B면으로 넘어가는데, 내 기억에 당시 B면의 첫 곡이 <오늘도 짜증나는 날이네> 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빠가 그 노래를 가만히 들으시고는 '짜증난다고 투덜대며 온통 불쾌한 뉘앙스로 가득한 노래를 왜 좋아하는지' 우리에게 물어보셨다. 물론 진지한 질문은 아니셨고 그저 H.O.T에 열광하는 어린 애들의 장단에 짓궂게 엇박 놓고 싶은 장난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촌형의 대답은 제법 진지했는데, 이 노래에서 화자가 짜증을 내는 이유 속에 투영된 문제 의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바라보는 긍정적 테마에 대해 조리있게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촌형은 타고난 머리가 좋아서 당시 중학생이었지만 어른들과의 대화에서도 웬만큼 논리가 밀리지 않았다.(이 형은 나중에 결국 명문대에 진학한다)
대답을 들은 아빠의 이어지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H.O.T가 그렇게 좋니?'
(세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네!'
'언젠가는 좋아하지 않을 날이 올텐데?'
그 때 사촌형이 대답했다.
'아니요! 저흰 좋아할 거에요. 영.원.히.'
누나와 나는 뒷자리에서 거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맞아요! 라고 외쳤던 것 같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이 대화가 가끔 떠오른다.
어쩌면 그렇게 똑똑하고 이성적이었던 사촌형의(이 형은 나중에 결국 공대에 진학한다) 입에서 나온 말, 그러니까 내가 들었던 말 가운데 가장 논리가 빈약했던 말이 아니었나 싶다.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말이기도 했다.
영원히 좋아한다라.
그러니까 멤버 가운데 리더가 결혼을 하고 누구는 구설수가 생기고 누군가는 사업을 하고 추억의, 추억의, 또 추억의 존재가 되어 아주 많은 것이 변한 지금.
저흰 좋아할 거에요. 영.원.히. 보다 언젠가는 좋아하지 않을 날이 올텐데? 라는 말이 더 내 것같은 나이가 되고 보니 참 그 기억이 귀엽고 아련하다. 아빠의 말이 맞다. 지금은 H.O.T 를 그 때처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흰 좋아할 거에요. 영.원.히.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날 수록 황금처럼 귀하고 반짝이는 감정이 되어 돌아온다. 그 때의 가방도 장갑도 뮤직라이프도 파스텔도 VIEW도 지금은 버리고 없지만 르망을 타고 캔디를 찬양했던 그 기억만큼은 앞으로도 가치있을 것이다. 영.원.히.
2.
다시, 1의 기억을 떠올리고 몇 자 적어보게 된 것은 박상영 작가의 <1차원이 되고 싶어>를 읽으면서 불려오게 된 옛날의 상념 때문이다. 지금이야 어린날의 생태를 중2병 등의 단어로 묘사하고(그마저도 지나치게 오래된 수식이다) 그 무렵의 질풍과 노도의 감각들을 많이 다루지만 내가 실제로 중2 무렵이었던 밀레니엄 시즌에는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는 그 어떤 부표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다. 취향과 감성의 골짜기가 깊은 곳으로 자꾸만 파고들던 때. PC통신 천리안으로 EBS 시네마천국 게시판에 접속하고 아버지가 전화를 사용하실 때면 사용을 중단해야만 했던, 채널아이로 처음 월드와이드웹과 다운로드의 개념을 이해하고 야후나 알타비스타, 심마니 등의 검색 엔진들의 진화를 목도했던 그런 시절. 수학에는 소질 없지만 암기하는 것 하나는 노가다로 승부보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번 사회과목만 공부하던 때. 그 무렵의 비상구는 MBC 라디오 91.9 메가헤르쯔 <이소라의 밤의 디스크쇼>나 <유희열의 음악도시> 같은 프로였다. 고정 패널로 배우 김선아, 개그맨 김진수, 서경석 같은 분들이 요일별로 방송하던 것을 듣고 다시 듣고 하면서 가끔은 테이프에 테이프를 붙여 녹음도 하고 REC과 PAUSE를 동시에 누르고 있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PAUSE를 떼고 테이프에 녹음을 한 뒤 컬렉션을 만들기도 했던 때. 시절도 감성도 영원하지 않지만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내면의 우주는 영원했으면 하고 바랐던 날들이었다.
그 무렵 나의 우주 속에는 사라 맥라클란도 있고(태어나서 처음으로 산 외국 가수의 음악 테이프가 그녀의 라이브 실황 앨범이다) 리아도 있고(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와 함께 레코드 가게에 가서 샀던 것이 리아의 2집 '개똥철학'이고, 명반이다) 그 보다 더 깊은 곳에 자우림이 있다. <1차원이 되고 싶어>에 언급되는 자우림이 이토록 중2병 스럽고 혼란스러운 우주, 아니 우주라고 하면 뉘앙스가 안 사니까 유우니이버어스으 라고 하자. 아무튼 이 유우니이버어스으에 나를 다시 되돌려놓았다.
PC통신 천리안에는 당시 비공식 자우림 팬사이트(?) 같은 것이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갤러리-커뮤니티 정도 개념의 공간으로 이름은 '자하연'이었다. 자하연 이라는 이름에 무슨 의미가 있었는데 ... 아무튼 잊어버렸다. 어쨌든 자우림을 참 좋아했는데 시작은 '미안해 널 미워해' 였고, 이 때 앨범을 산 뒤 미안해 널 미워해 보다 더 심장을 울리는 '연인' 같은 노래들이 있다는 것을 듣고 혼자 우쭐하기도 했으며 이게 사실 2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1집을 산 뒤 '파애'나 '안녕, 미미' 같은 곡을 새벽에 듣는 버릇도 들였고, 아무튼 그 때 부터 이래저래 신내림 쏟아지듯 중2병식 정신개조의 시발작용(씨발작용일 수도 있다)이 가속화 되고 말았던 것이다.
자하연으로 돌아오면 아무튼 여기에서 이런 저런 활동을 하면서 1집, 2집, 2.5집을 섭렵하였고,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여러 형 누나 언니 오빠들과 비대면 교류를 하며 무럭무럭 건방지게도 성장하였다. 또한 그 때부터 그냥 학교에서 듣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콘서트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고, 교실 의자에 앉아서도 언제나 마음은 부릉부릉 보글보글하는 순간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3집이 나왔을 때. 그러니까 뭔가 매직카펫라이드 같은, 노래는 신나지만 하하하쏭이 나왔을 때와 같은 느낌으로 약간의 실망(?) 아닌 실망이 조금 번지기 시작할 때쯤(연인 같은 노래는 어디에?), 그러니까 3집에서 가장 좋은 노래는 '새'나 '뱀'이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자하연에는 콘서트관련 공지가 올라오게 된다. 그 때 종로 모처에서 공연을 하는데(종로 였는지 대학로 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뭐 글을 이해하던 시절이었겠는가 16살인데.), 자하연 회원들을 선입장 시켜주겠다는(팬클럽에도 등급이 있고 뭐 지금도 이런 저런 이벤트나 혜택이 있는 것처럼)것이었다. 아무튼 그 때 그 글에 혹해서 처음으로 콘서트라는 것을 가보게 되었고 오후 늦은 시간이었는지 저녁이었는지 공연이었는데 낮부터 가서 줄을 선 뒤 들뜬 마음으로 김윤아의 보컬과 이선규의 기타와 김진만의 베이스를 들을 생각에 부릉부릉 보글보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안 풀렸는지 소통의 문제인지 자하연 멤버들의 선입장은 무산되고 말았다. 일반 관객들과 달리 따로 줄을 서고 있었던 자하연 회원들은 낙담하며 다시 줄을 서야만 했고 이 때문에 조금 더 앞줄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손해를 보고야 말았다. 그 때 자하연 회장님인지 시삽인지 하셨던 분이 공연(혹은 공연장) 관계자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과 목소리를 높여 싸우셨고 끝내 자하연의 선입장이 무산되자 머리를 쥐어뜯으시며 한참동안 분을 참지 못하셨는데 그 한숨의 질감 같은 것들이 기억난다. 잘 지내고 계실런지.
공연은 스탠딩이었다. 이래저래 난리가 났었다. 신나게 뛰었고 노래를 따라불렀고 땀을 흘렸고 뭐 ... 한창 클라이막스로 향할 때 이선규 님이 마이크에 대고 한 마디를 하셨는데 그 때 하신 말씀이 '오늘 다 죽자.' 였고 ... 그 말에 분위기가 고조되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뭐 ... 김윤아님은 실물이 더 멋있으셨고 라이브가 너무 좋았고 한 건 사실 첨언할 필요가 없고 뭐 ... 사실 그 때 김윤아님이 중간에 팝송 두 곡을 부르셨는데 그 중 한 곡이 약간 락발라드 느낌의 어떤 노래였는데 멜로디가 참 좋아서 나중에 몹시 오랫동안 그 곡을 찾아헤맸으나 무슨 곡인지 끝내 찾지 못했고 지금도 모르고 있다. 혹시 2000년 3집 발매기념 스탠딩 콘서트 당시 김윤아 님이 레퍼토리 삼으셨던 팝송이 어떤 노래 인지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나즈막히 알려주시기를.
지금까지 구구절절 긴 일기를 써내려 오는 동안 한 가지 적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당시 자우림 콘서트를 혼자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같이 간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심지어 같은 반 친구 K였다. K도 자우림을 좋아했다. 자우림 1집을 종로였는지 광화문이었는지 그 동네에서 샀는데 그 때도 K와 함께였다. 당시 가지고 있던 소니 워크맨에 테이프를 사자마자 넣고 한 쪽 씩 귀를 꽂고 들었는데 정말 함께 자우림 1집 노래가 시작될 때의 전주를 들으며 얼마나 심장이 뛰었는지. 그 감각은 지금도 이 사라지지 않은 중2병 깊은 내면 유우니이버어스으에 살아남아 있다. 두근두근 보글보글.
K는 약간 마르고 손가락이 길다란 천재스타일의 친구였는데 나중에 성인이 되어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고 상당히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는 사실까진 알고 있지만 그 이후는 알지 못한다. 자우림의 팬이었다는 사실을 기억은 할까. 아무튼 잘 살고 있겠지 뭐 ... 다만 그 때 우리가 소니 워크맨, 그러니까 몇 달 뒤 혼자 동대문 밀리오레에 가방 사러 나왔다가 근처 한양공고 양아치 두 명 한테 삥뜯기면서 같이 빼앗겨버린 - 그 때 어찌나 원통했는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두 명 중 한 사람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김남X. 나쁜 놈. - 그 워크맨 귀 한 쪽씩 들으면서 자우림 노래 좋다 신기하다 했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당신의 마음 어딘가, 또 복잡하고 창피한 유우니이버어스으 어딘가에, 살아남아 있기를. 앞으로도 영.원.히.
3.
이제 시절은 군대 즈음으로 넘어오게 된다. 한동안 책도 음악도 멀리하며 살다가 상병인지 병장이 되고 나서야 다시 책도 좀 보고 영화도 좀 보고 음악도 듣고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음, 몇 가지 계기가 있는데 하나는 군대 도서관이 생긴 것(그 때 생겼는지 리뉴얼 된건지... 그 전에는 부대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하기가 어려웠고 몰랐던 것일 수도 있지만)과 군대에서 영화 좋아하는 친구를 만난 것이 되겠다.(이 친구는 J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이야기하기로 한다)
당시 내가 있던 부대에서는 끔찍한 일이 있었다. 부대 내 사고로 간부 한 분이 사망하신 것이다. 영관급 이셨다. 불운한 사고였고 너무 큰 일이었기 때문에 부대 장병, 간부, 군무원 분들 할 것 없이 전부 참석하여 장례식을 치뤘던 기억이 있다. 행사가 매우 엄숙했고 규모도 대단히 컸다. 사고 이후 간부 님의 미망인 되시는 분께 부대 차원에서 어떤 일자리를 제공하셨던 것 같은데 -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어떤 제안이 있었는지, 원래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누가 먼저 어떻게 하겠다고 한 건지 복잡한 내막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 짐작된다 - 아무튼 그 미망인 분께서 부대 도서관 사서를 하게 되셨다. 책을 자주 빌리게 되면서 그 분과 인사를 하고 잠깐 이야기도 나누고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조금은 쓸쓸하고 안타깝고 아련한 기억이기도 하다.
문학-인문학을 주로 읽었는데 이제 군대 같이 고립된 곳은 특히 계급이 높아지면 시간이 많아지고 그럴 때 독서를 하면 연쇄작용이 성실하게 일어나는 장점이 있다. 박완서님의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해산 바가지 같은 작품이 실린 단편집을 읽으면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읽게 되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렇게 또 읽게 되는 그런. 이청준 작가님의 책이나 은희경 작가님도 그렇게 읽고 이제 인문학 쪽에서는 박노자님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라던지 당신들의 대한민국 같은 것에 심취해서 주변에도 추천하고 다녔던 기억들이 난다. 신기하게도 그런 책을 읽다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같은 게 궁금해져서, 또 짧은 책이고 역사에 남는 책인데 이름은 많이 듣지만 정작 읽지는 않는 뭐 그런 느낌이 책인지라 더욱 궁금해져서, 온라인 서점 택배를 통해 군 부대로 들여와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내가 병장이었는데 이 책 읽는 광경을 보고 일병 후임 하나가 '이거 부대에 있으면 안되는 책 아닙니까?' 했던 기억이 있다. 아이러니하니까 우리는 그냥 하하하 웃고 말았다. 뭐 나는 별종 군인이었으니까 그런 모든 게 그 무렵에 다시 불어닥친 질풍과 노도에 따른 씨발작용 아니겠나 싶을 뿐이다. (물론 내무사열 할 때는 경찰 피해 도망치는 마음으로 속옷장에 쌓여있는 군용빤쓰 아래에 책을 숨겼다. 하하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친구 하나가 그 제대 전-후로 등장했었는데 책도 많이 읽고 아무튼 똑똑한 놈이었다. 그 친구가 이태준을 읽으라고 해서 무서록도 읽고 문장강화도 읽고 단편 전집도 읽고 했다. 확실히 이태준작가님을 왜 읽으라고 했는지 글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와 정말 이 분은 문장 하나하나를 로저 페데러가 백핸드 치는 것처럼 쓴다. 명문 그 자체. 이후 무서록은 두고두고 그냥 몇 년에 한 번씩은 다시 보는 책이 되었다. 그런데 한참 그런 패턴으로 글을 읽다가 이제 이문열을 읽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문열 작가님은 이제 나의 경우는 부모님 세대의 어떤 한 시절을 풍미하고 관통했던 상징적인 분이셨고 뭐 김승옥 작가님이나 전경린 작가님을 보다보니 그 어떤 천재 계보의 수직선상에 꼭 등장하시는 분이라 자연스레 손에 쥐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만 알고 있었고 그 외에는 어릴 때부터 집에 있었던 이문열 평역 삼국지의 그 이문열로 각인 되어 있던 작가님이다. 그러니까 이제 책을 좋아하는 엄마한테 글 제일 잘 쓰는 사람이 누구야? 하면 응 그건 이문열. 이런 식으로 매커니즘화 되었던 분위기가 존재했던 것 같다.
칼레파 타 칼라, 금시조, 들소 등 여러 중단편이 실린 소설집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 좋았다. 어떤 열망과 저열함 열등감 폭력 본능 뭔가 여러가지가 꿈틀 대는 듯한 글들. 인간의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은 관찰 묘사와 텐션 가득한 플로팅. 다른 작가님들과는 또 다른 색깔의 짜릿함이 있었다. 방금 전 문단에서 언급한 똑똑한 친구에게 또 호들갑떨면서 이런저런 이문열 작가 이야기를 했다. 글이 좋더라. 금시조가 좋더라. 뭐 이런 말들. 굳이 그 친구한테 짧은 감상을 이야기 했던 건 그 친구가 아주 명확한 자기 신념과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던 아이였기 때문이다.(이럴 때 보면 굳이 H.O.T 좋아하는 10대 앞에서 영원히 좋아하는 것은 없다고 엇박 놓는 아버지 모습이 부전자전으로 묻어나는 것 같다.) 나는 정치-사회의 어떤 줄기를 그 친구에게 정말 많이 배웠다. 심지어 핸드드립 커피를 처음 먹었던 것도 그 녀석 때문이다.(얘도 K다) 아메리카노나 기계가 내려주는 브루드 커피만 알았지 핸드드립 커피 세계는 몰랐던 20대 초반의 애송이에게 핸드드립 커피를 알려줬다는 건 정말 내 내면의 유우니이버어스으에 행성 하나 만들어준 셈이 되므로 그 앞에서 큰절을 해야 마땅한, 참 어른같은 친구였다. 그런 친구한테 금시조가 좋다고 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의 색깔은 뻔한 것이었다.
'그 때 금시조는 참 좋았지! 지금은 그 금시조가 날아가 버렸으니까 문제지!'
뭔지 알겠나? 그런 식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보네것 식으로 So It Goes. 뭐 ...
두서가 없다는 표현 참 좋아하는데 - 이제 실생활에서는 중3 때 교생으로 오신 국어 선생님(서울대사범대학국어교육과 출신의 교생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가 돌아온 답장에 써 있던 것을 본 뒤 내가 애용하는 문장이 되어 버린 표현이다. - 내 글이 보통 의식의 흐름을 잘 따라가고 꽤나 두서 없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취향이 그렇다. 누군가는 내가 싸이월드를 하던 시절에 BGM 노래를 한영애 - 머라이어 캐리 - 김광석 - 벨벳언더그라운드 - 씨저시스터즈 뭐 이런 식으로 걸어놓은 걸 보고 이 표현을 쓰기도 했고, 영화에 있어서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부터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공원>까지 좋아한다고 말하는 정도다.
아무튼 모든 것의 시작은 영원할 것 같았던 혹은 영원하지 않다고 믿었던 어떤 기억과 감정들 때문이다. 이토록 영원이라는 낱말을 좋아하고 그 의미가 좋고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신내림의 기억마냥 강렬해서 노래도 김종서의 영원 조관우의 영원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두서없는 인간인지라 캔디에서 금시조 까지 이어지는 글을 한 번 써본다. 아쉽게도 자하연을 함께한 K나 핸드드립을 함께한 K나 지금은 다 어디에서 뭐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인연이 되었다. 역시 아버지 말대로 H.O.T를 좋아하는 마음에 영원이 자리잡기 어려운 것처럼 인간의 관계도 그런 것일까? 하지만 시간이 그 후로 오랫동안 지난 현재에도 누군가에 대한 기억, 시절에 대한 기억, 별 거 없이 작게 날아다니는 먼지 하나 같은 기억이 이토록 선명하고 짜릿하게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세상 어딘가에는 영원이라는 게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고 한편으로는 대책없이 그렇게 믿고도 싶다. 한낮의 우울도 아닌 한낮의 다시 찾아온 중2병(Demon보다 더 무섭다)에 이토록 탐닉한 인간이 캔디부터 금시조 까지 한 번 두서없고 지저분하게 훑어본다.
이제 시간이 지나서 또 이렇게 아무 말이나 떠올리면서, 또 다른 내 인생의 K들과,
유우니이버어스으를 확장시킬 수 있는 그런 좋은 시절을 다시 만들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런 좋은 시절을. 영.원.히.
*
(좋은 생각이나 쓸모 없는 생각이나 뭐 아무래도 좋은 말들을 글로 정리해 남겨 보고 싶다는 생각에 터를 판 브런치 인데 이게 생각보다 익명 보장이 전혀 되지 않는 - 내 의지와 반하는 상황 - 경우가 발생하고 있어 글을 편하게 쓰기가 쉽지 않다. 결국 내킬 때 마다 가끔 뭔가를 쓰러 오게 되는데 뭐 어쩌겠는가. So It G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