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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Apr 12. 2024

과외선생전설

시시콜콜한 이야기


*이 글은 2013년도에 8월에 작성한 글을 약간 다듬은 것입니다.






1.


과외 수업을 하러 정읍까지 간다고 하면 다들 한 마디씩 한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이 친구는(이하 K군) 3개월 정도인가 지속적으로 카톡을 보내왔다. 한 번만이라도 수업을 하고 싶다는 간절함을 피력하여 - 대개는 시간될 때 서울로 올라오라 한 뒤 한 달에 두 번 정도 수업을 하면 적당하지만 - 어떤 아이인가 한 번 보자 하는 마음과 살면서 언제 또 정읍엘 가보겠느냐는 심보가 맞물려 고속버스를 타게 된 것이다. 그 이후, 그 친구도 한 두번 서울에 올라오고 이메일과 카톡으로 이런 저런 정보를 주고 받으며 간당간당한 수업을 몇 달 째하고 있다.




그저께(2일)는 내가 정읍에 두 번째로 내려간 날이다. 오전에 인터뷰 하나를 마치고 오후 차를 타니 도착한 시간이 17시 30분 이었다. 내가 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 캔디크러쉬를 지속적으로 하는 바람에 핸드폰 배터리가 두 개 모두 방전되어 대충 몇 시에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놓고 잠을 청했다. 이 배터리 문제가 나를 하루종일 힘들게 하리라곤 그 때만해도 결코 알 수 없었다.




K군은 교복을 입고 나왔다. 처음 정읍에 갔을 때는 정장을 입고(넥타이도 매고) 나를 맞이해 주었다. 고딩이 무슨 정장이냐는 말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그렇다고 하니 뭔가 아닌 것 같으면서도 애잔하고 그래서 열심히 수업을 했었다. 역시 정읍은 공기가 좋구나를 연발하며 호젓하게 시내로 들어선 뒤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실기시험이 코 앞이었기 때문에 그간 밀려있었던 영화사 수업부터 면접 요령, 시놉시스 만들기 등을 쉬지않고 진행하다보니 시간은 21시가 되어 있었다. 정읍에서 서울가는 버스는 평일/주말을 막론하고 22시가 마지막이다. 우리는 수업을 서둘러 종료하고 더럽게 성의없이 김밥을 말아주는 근처 김밥천국에 가서 라면과 김밥을 해치운 뒤,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는 심야우등이라고 짜증나게 돈을 더 받았다. 그렇게 K군을 보내고 나는 깜깜한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버스 안에서 자다깨다 하며 캔디크러쉬를 했다. 정안휴게소에 들를 때만해도(정읍행 버스는 상/하행선 모두 정안휴게소에서 한 번 멈춘다) 카페에서 충전을 해두었던 내 배터리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죽전을 지나 얼마 안된 지점에서 내 두 개의 배터리는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2.


고속터미널에 도착하니 4일 0시 50분이었다. 정읍은 편도 3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므로 대충 예상했던 도착시간이었다. 터미널을 빠져나간 뒤, 생각했다.


'자, 이제부터 어떻게 집에 갈 것인가?'


그냥 택시를 탈까 생각했지만 최근 돈을 길바닥에 뿌리는 수준으로 택시를 과히 이용했기에, 최대한 택시비를 아껴보고 싶었다. 일단 지하철은 막차 끝났다고 아저씨가 진입을 막고 있었고, 고속터미널에서 집까지 오는 버스인 14X 시리즈도 모두 종료 상태였다. 일단 강남역 부근으로 가면 늦게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360번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나는 몇 정거장지나 논현역에 하차했다. 하지만 여기도 집까지 가는 14X 버스들은 모두 종료였다. 이를 어쩌나 하고 있는데 눈에 들어온 것은 생긴지 얼마 안 된 심야버스 운행 안내였다. 곧 N13 버스가 청량리~돌곶이~석계 구간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나는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논현역 정류장에는 새벽 1시가 지난 시간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생각해보니 휴일(개천절)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늦게까지 놀거나 술마신 사람들이 많을 터였다. 정류장에 멈추는 버스마다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는데 N13 버스는 얼마나 사람들이 많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27분 후에 도착한다는 안내를 보고 잠시 망설였으나, 그래도 버스를 타기로 결심하고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술이 거나하게 취한 중년의 사내가 비틀거리며 정류장에 들어섰다. 코가 완전히 비뚤어져서는,


'이거 어떻게 가야 돼~ 이거~?'


하며 혀꼬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슬쩍 쳐다보는데 안경을 쓴 중년 사내의 모습이 어딘지 익숙해 가만히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고등학교 때 나를 가르치셨던 영어 선생님이셨다. 고1 때 그 분의 수업을 들었으니까 정확히 12년전이다. 박OO 선생. 수업시간에 모든 대화를 영어로 진행해 학생들을 경악케 만들었으나 몇 가지 한정된 어휘만 사용하여 나중에는 우리에게 웃음을 주셨던 그 분.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하셔서 체육대회라도 하면 - 당시 우리 고등학교는 고3 때도 주 3회 체육시간을 철저하게 지켰고, 체육대회도 성대하게 치룬 데다 성적은 바닥권이어서 '너희 체고냐?'는 비아냥을 듣던 곳이었다. - 선생님들이 예의상으로라도 운동화에 츄리닝을 챙겨오는 데 박OO 선생님은 꿋꿋하게 가을 자켓과 후줄근한 구두를 신고 스탠드에 앉아 응원이고 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런 분이었다. 그 분이 서류가방을 어깨에 메고 검은 정장을 입은 채


'이거 어떻게 가야 돼~ 이거~?'


하면서 정류장의 진상 승객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전화를 꺼내는 폼이 콜택시를 부르시려는 것 같았다. 10년이 지났는데 오히려 그 때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보이셔서 세상에 이런 회춘이 다 있나하며 잡생각에 빠져있을 때 N13번이 왔다. 예측은 정확했다. 버스는 앞문이 안 열릴 정도로 승객들이 빽빽히 들어차있는 상태였다. 겨우겨우 사람들을 비집고 올라타는데 성공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자꾸 누가 뒤따라 타서 나와 내 가방을 뭉개려고 했다. 뭐야 이거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뿔싸 택시 대신 심야버스를 선택한 박OO 선생이다. 나는 수업용 노트북을 담은 노트북 가방과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공짜로 나누어준 크로스백을 몹시 부담스럽게 같이 메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안 그래도 운신이 불편했는데, 10년 만에 꽐라된 모습으로 만난 나의 스승과 술냄새 진동하는 심야버스에서 서로 등을 밀쳐내고 있으려니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었다.






3.


심야버스는 무척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발 디딜틈 없이 들어차 있었는데, 이 승객들의 태도가 마치 격한 풍랑속에서 구명보트라는 한줄기 빛을 만난 사람들의 태도 같았다.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는 일종의 Respect까지 보여서,


'앞문으로 내리실 분 계십니까?' 하면 서비스 센터 직원이 고객한테 응대하는 톤으로


'저요~' '네, 있습니다~' 하면서 친절하게 대꾸하고, 그 사람들이 내릴 때는 그 좁은 공간속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내어주려 길을 만들어 주곤 했다. 계단에서 올라오지 못해 문이 안 닫힐 때는 올라올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주거나 손을 내밀어 주기도 했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심야버스라니. 너무 사람이 많아 문을 열 수가 없었던 정류장에서 버스를 못 탄 여성이 울상을 짓자 모두 함께 아쉬운 탄식을 내뱉었을 때는 심야버스 승객 연대의식이 절정에 달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버스는 한참을 돌아갔다. 차량이 무거워 속도도 빠르지 않았다. 결국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지나 돌곶이 역에 내렸을 땐 2시 22분이었다. 드디어 N13에서 탈출했다. 박OO 선생도 어딘가에서 내린 것 같았다. 여기서는 집까지 걸어서도 갈 수 있고, 택시를 타도 3000원 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바람이 상쾌했다. 그래도 시간이 늦었으니 택시를 타기로 했다. 그래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3000원 택시값내고 집까지 왔으면 대성공이라 생각했다. 얼른 가서 핸드폰 충전하고 문자확인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까지 왔는데, 집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4.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열쇠를 넣는 가방 안의 안 주머니에 열쇠가 없는 것이다. 집 앞에서 가방 전체를 뒤집어가며 10분 동안 열쇠를 찾았다. 없다.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정읍에 떨구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열쇠가 없다. 내 방까지 가기 위한 두 개의 관문 - 대문과 현관문 - 모두를 열 수가 없다. 담을 넘기도 애매하다. 또 담을 넘으면 뭐하겠는가. 현관문이 잠겨있는데. 전화기? 전화기가 꺼져있다. 밧데리가 두 개 모두 없다. 망할 캔디크러쉬. 그렇다고 새벽 2시 30분에 주택밀집지역의 한 가운데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망측한 행위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굳게 닫힌 철제 대문 손잡이를 움켜쥐고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결론은 단순했다.


'씨발!'




3000원내고 집에 왔다고 좋아했던 게 억울했다. 난 성공했는데. 집에 못들어가다니. 여기서 선택사항이 별게 없었다. 편의점에 핸드폰을 잠시라도 충전 맡기고 집에 연락해 열어달라 한다. 혹은 숙박업소나 찜질방에 가서 잔다. 자취하는 애인집에 간다. 그 정도. 그런데 이 시간에 가족들 깨워서 문 열어달라는 건 도무지 미안해서 못하겠는거다. 찜질방에 가자니 - 물론 집 근처 찜질방은 훌륭한 시설을 자랑하지만 - 도무지 잠을 제대로 못잘 것 같고 공기도 안 좋고 더군다나 노트북을 비롯한 중요한 물건이 꽤 많았어서 불안했다. 일단 근처 숙박업소를 찾기로 했다. 이 바람에 성신여대 입구까지 가는데 택시를 한 번 더 탔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게 제일 아까운 돈이었다. 하지만 성신여대 입구, 돈암동 지역이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고 숙박시설도 잘 되어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일단 가기로 했다. 피곤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시점이었다. 3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도착하니 서너개의 모텔 간판이 보였다. 제일 커보이는 R모텔로 들어갈까 하다가 비쌀 것 같아서 그 옆의 모텔로 향했다. 그런데 모텔 간판에 불이 꺼져있는 것이 보였다. 아뿔싸! 방이 없나? 맞아 오늘 개천절이지! 휴일만 되면 사람들이 놀러 나오고 숙박업소에 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걸 뒤늦게 인지한 것이다. 뛰는 걸음으로 모텔에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카운터는 닫혀있고 거기에 써 있는 메세지 


'방 없습니다.'


서둘러 나와서 R모텔로 향하는데 정말 R모텔의 간판불이 내가 달려가고 있는 그 와중에 뚝! 꺼져버렸다. 헐레벌떡 들어가니 직원분이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방 없습니다.'


그렇다. 우리나라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국경일에 모텔은 방이 없다.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고 마지막 모텔로 향했다. 카운터에 불이 켜져 있었고 술 취한 것처럼 보이는 남녀가 현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방이 있는 모양이었다. 달려가보니 카운터에 뭔가 기분이 안 좋아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직원분이 있었다. 


'방 있습니까?'


'예. 방은 있는데.. 지금 카드 리더기가 고장나서 현금 계산 밖에 못합니다.'


기분이 안 좋아보이는 표정을 지은 이유가 있었다. 당연히, 내 수중에 몇 만원의 현금은 없었다. 카드 계산이 안 되면, 그럼 어쩌라고. 길 건너 편의점 가서 수수료 물고 돈 찾아와서 결제하라고? 그 때쯤 되니 이도저도 다 싫은 상태가 되었다. 정도 심한 꽐라가 되어버린 남녀가 현관에서 서성 거리다가 카운터로 들어와 직원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아저씨, 그래서 특실하고 준특실의 차이가 뭔데요? 네?'




난 그냥 나와버렸다. 이 동네를 떠나고 싶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씨발!'






5.


마지막으로 애인 집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그래도 그게 모텔에 돈 내는 것보단 저렴했다. 택시 안에서 시간을 보니 3시 30분이었다. 택시 아저씨가 마침 지금 구로쪽 기지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해서 골목까지 데려다 달란 말도 못하고 큰 길가에 내렸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애인이 사는 건물에 오니 입구도 번호키로 스르륵- 열리고 집 현관문도 8자리 번호와 샵버튼으로 띠리릭- 열렸다. 짐스러운 가방 두개를 털썩 내려놓으니 인기척에 깬 애인이 게슴츠레 입을 연다.


'자기야~?'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냥 목 놓아 울어버렸다.


'엉엉엉~엉엉엉~엉엉엉~'




과외선생전설. 






2013년, 내가 썼던 글은 여기서 끝이 난다. 

이따금 정읍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꿈처럼 찾아올 때면 이 글을 꺼내 읽는다. 그러나 이 때 이후로 아직까지 그 곳에 다시 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후 정읍에 살던, 영화과 진학을 지망했던 K군은 서울의 모 4년제 대학 영화과에 합격했고 나는 그 이후 한동안 입시 강의를 하며 같은 학교 영화과에 몇몇 학생을 더 합격시켰다. 그들이 서로 아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당시의 영어 선생도 K군도 집을 제공해준 애인도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알 길이 없다. 열쇠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집과 노트북이 든 무거운 가방, 지금도 가끔씩 타고 다니는 심야 버스만이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내 곁에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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