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을 펴라, 바다로 가자
움직이는 침대와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침대 위에서 고통스러워하다가 (관객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눈에만 보이는) 뭔가를 발견하고 즐겁게 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다시 찾아온 고통에 괴로워하던 남자는 슬픔과 기쁨 가운데에서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에 놓여있다. 어떤 결심인 듯 혹은 체념인 듯 남자는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침대에 링거를 떼고 구름으로, 침대에 놓여있던 흰 천을 돛으로 바꾸어 여행을 시작하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마린보이는 표정을 참 잘 쓴다. 표정을 잘 쓰는 단순한 기술을 확장하여 거리에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광대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이번 서울거리예술축제에서 보여준 <항해>는 광대가 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롯한 신체만으로 사람을 울고 웃게 만드는 이야기를 완성했다. 나는 이 공연이 너무 슬프고 아름다워서, 극을 보는 내내 눈물이 고여있었다. 비눗방울에 아이처럼 기뻐하다가도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힘겨워하는 얼굴, 자신의 괴로움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침대’라는 공간을 바다를 상상하며 ‘배’로 갈음하고 끝내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공연이 끝나고 아이들은 신나게 침대에 올랐고, 관객에게 함께 인사를 하며 무대에서 사라졌다. 아이들도 침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남자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삶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얄궂은 구석이 있어서 때론 불행하지만 그래도 기꺼이 돛을 펼칠 수 있는 힘이 있기를 바란다.
정원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서 ‘관객 학교’라는 글을 좋아한다. 60페이지에 있는 표현을 빌려오자면 “우리는 보통의 삶으로는, 때로 관객이 되지 않고는, 허다한 문턱을 넘어갈 수 없을 것이기에.” 우리는 그러함으로 기꺼이 관객이 되어야만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 이 글은 인스타그램과 페북에도 올렸습니다.
너무 좋았던 공연의 창작자가 댓글도 남겨주었는데, 성덕인 된 듯한 기분이었어요.(하하)
+) '정원'은 친애하는 그녀, 작가이자 음악가인 목정원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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